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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알베르 꼬엔6

바흐를 좋아하시나요? 어언 60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가을날 교정에서 《생의 한가운데》(루이제 린저)를 읽어봤는지 물은 그 여학생을, 그로부터 50년쯤 후 남한산성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에서 만났다.그 교정에서 그 여학생은 예뻤다. 짝을 찾는 일을 제쳐놓고 실속 없는 일에나 정신이 팔린 내게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노트 복사물을 만들어 은밀하게 건네주기도 했다. 수어장대 올라가는 길은 호젓하진 않았다.그 옛날 우리 반 동기생들이 남한산성 아랫마을 한 식당에 많이 모였는데 그녀와 나 중 어느 쪽의 의도였을까,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던 그 길에서 어느 순간 그녀와 내가 둘이서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 것이었다. 다른 얘기들은 전혀 생각나지 않고 그녀가 남편을 만난 얘기만 또렷하다.그 남편도 우리 반이었으므로 나하고.. 2025. 1. 19.
삶을 시처럼 음악처럼... ⇧ Elle Magazine 2024년 4월호 표지(부분)     "니콜 키드먼, 18년 동안 결혼생활하는 비결 “양방향 샤워기+화장실 2개 덕분”(해외이슈)" 인터넷 서핑 중이었다. '뭐라는 거지?'  할리우드 배우 니콜 키드먼(57)이 컨트리 가수 키스 어번(57)과 18년 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을 털어놓았다.그는 3일(현지시간) W매거진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양방향 샤워기를 갖고 있다”면서 “양방향 샤워기가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비결이다”라고 말했다.이어 “별도의 화장실”을 설치한 것도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이하 생략)  18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자랑한 것도 그렇지만('나와 다른 세상 사람이긴 하지') 화장실을 2개(별도의 화장실) 설치한 걸 비결이라고 한 것도 어처구니없었다.내겐 .. 2025. 1. 8.
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2》 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2》윤진 옮김, 창비 2018      그리하여(《군주의 여인 1》) 쏠랄과 아리안은 다시는 헤어날 길 없는 사랑의 늪에 빠져버린다. 이 소설은 그 사실을 끝없이, 그리고 자세하게 이야기해 준다.아리안이 잠시 출장을 간 쏠랄에게 보낸 편지 일부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저녁 8시에 집으로 돌아왔죠. 9시 오분 전엔 북극성을 보기 위해 정원으로 뛰어갔고요. 당신도 북극성을 봤겠죠. 당신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 다음엔 나의 숲을 거닐었고, 꽤 늦게까지 있었어요. 침대에 누워 당신이 보내온 전보들을 다시 읽었는데, 혹시라도 편지에 담긴 향기가 날아가버릴까 봐 너무 많이 읽지는 않았어요. 당신의 사진도 손으로 가려가며 조금씩 봤죠. 그것도 너무 오래 보지는 않았고요. 안에 담긴 .. 2024. 12. 24.
보고서 만들기 사교육비 절감 방안 T/F를 만들어 밤낮으로 토론하고 검토한 결과로써 두툼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 일은 역사적으로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그 T/F에 소속되었을 때 나는 다른 볼일을 보고 싶어서 늘 미적거리고 핑계를 대고 하다가 말았다. 미안했지만 그런 일은하기 싫었고, 그 대신 열심히 일한 사람이 좋은 평가를 받을 때 섭섭해하지 않았다.덧붙이면, 그래봤자 별 수가 없어서 사교육은 자랄 대로 자라왔다. 소설 "주군의 여인"을 읽으며 또 그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 국장들은 갈팡질팡하면서도 요령껏 능숙하게 말을 이어갔다. 자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말이 너무 길어서 짜증이 난 동료들이 메모지 위에 도형을 그리고 또 우울한 얼굴로 그림을 다듬는 동안에, 판프리스.. 2024. 12. 12.
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1》 알베르 꼬엔 《주군의 여인 1》윤진 옮김, 창비 2018      스위스 호반도시 주네브의 국제연맹 사무차장 쏠랄, 젊고 키가 크고 잘 생기고 직위가 높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유대인 쏠랄은 뭇 여자들이 사랑을 퍼붓는 동쥐앙이지만 그는 자신의 외모와 직위 같은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을 꿈꾸며 파티에서 만난 부하직원의 부인에게 첫눈에 반한다.그 '아름다운 여인'은 주네브 명망가(家) 출신  유부녀 아리안 도블이고, 무능하고 천박하면서 출세만을 꿈꾸는 범속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제연맹 B급 직원 아드리앵 됨이 그녀의 남편이다.쏠랄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꿈은 그에게 모든 일, 모든 여자에 대한 경멸감을 품게 한다. 아름다운 여인 아리안에게도 그렇게 접근하다가, 그녀의 남편 아드리앵을 A급 직원으.. 2024. 12. 10.
알베르 코엔 《내 어머니의 책》 알베르 코엔 《내 어머니의 책》조광희 옮김, 현대문학 2002      가엾은 엄마, 이 세상의 기쁨을 철저하게 박탈당했던 엄마,엄마, 당신이 준 내 손에 입을 맞출 수밖에 없어요.어쩔 수 없이 벌써 푸른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던, 그 작은 손. 사랑하는 엄마,그 서투른 성녀─자신이 성녀임을 알지도 못하는─아, 나의 수호신, 엄마, 내 사랑하는 딸이여!오, 내 잃어버린 젊은 시절인 엄마.오직 한 사람뿐인 나의 유일한 간호원,오 당신, 유일한 사람, 어머니, 내 어머니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내 열 살 적 예쁘던 엄마, 이제는 거의 해골로 변한 그 엄마, 천천히 흘러내리는 내 눈물에도 무심하고, 귀먹고 무감각한 내 엄마,여왕폐하,당신들, 모든 나라의 어머니들, 내 어머니의 자매인 당신들.. 2024. 11.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