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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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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단테 안단테 Andante Andante" 저물어 석양이 붉고 내일이 휴일이어서 차는 끝없이 밀리고 몸이 굳어버린 건 이미 한참 되었어도 주차해서 굳은 몸을 펴줄 만한 장소는 보이지도 않는데 "세상의 모든 음악"(93.1) DJ가 아바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나는 그 시절에 듣던 노래들의 가사를 번역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흥얼거렸습니다. 다행인 것은 아무도 무슨 노래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뭘 알겠나?') 나는 세월도 그렇게 흘려보냈습니까? 아이들도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다 망쳐놓았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힙니다. 노래를 들으며 E대학교 영문과 교수를 지낸 P를 생각합니다. Take it easy with me please Touch me gently like a summer evening breeze Take your time mak.. 2023. 8. 15.
그리운 도깨비 이순 耳順, 종심소욕 불유구 從心所欲 不踰矩 그런 건 아예 말고 내내 팍팍함... 도깨비 귀신이 어른거려서일까 그런 걸 떠올리고 그리워해서 그럴까 2023. 2. 5.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그냥 재미 삼아 쓴 소설은 아니었다. 순전히 우수(憂愁)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독후감을 쓰긴 했지만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그 석연치 않음으로 우수의 사례를 옮겨 써 보자 싶었는데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골라놓은 것이 우선 옮겨 쓰기에는 너무 길었다. 어쩔 수 없어서 발췌를 해보았는데, 그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버려서 제목도 저렇게 '아름다운 오후의 쓸쓸한 장례식'이라고 아버지 이야기에 따르게 되었다. 1862년 끝여름 무렵 마담 에벨리나 코르제니오프스키는 당시 다섯 살이 채 되지 않은 아들 테오도르 조지프 콘래드를 데리고 포돌리아(지금은 우끄라이나 서부지역으로 당시는 러시아령 폴란드였다)의 작은 도시 치토미르를 떠나 바르샤바로 갔다. 문학활.. 2022. 5. 7.
"도대체 물이 뭐지?" 젊은 물고기 두 마리가 나이 든 물고기를 지나쳐 헤엄친다. 그들이 지나갈 때 나이 든 물고기가 묻는다. "좋은 아침이야, 젊은이들. 물은 어떤가?" 두 마리의 젊은 물고기는 한동안 계속 나아갔다. 마침내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물었다. "도대체 물이 뭐지?"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의 이야기한 우화란다(티나 실리그 《인지니어스 INGEIUS, 리더스북 2017, 89). "도대체 물이 뭐지?" 나는 그렇게 물었던 그 젊은이였다. 2022. 3. 28.
앨리스 먼로 ... 기억 보트가 움직이자마자 옆자리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트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항해 내내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일어나 갑판으로 나가 사람이 거의 없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구명 용품이 든 통 중 하나에 자리 잡고 앉은 그녀는 익숙한 장소들, 또 알지 못할 장소들에 대해 아련한 아픔을 느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것이었다. '기억'함으로써 그 모든 일을 다시 한 번 경험한 후 봉인해 영원히 보관해 둘 생각이었다. 단 하나도 놓치거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날의 일을 순서대로 재구성해 마치 보물인 양 마음 한구석에 갈무리해 넣어두려는 것이었다. 메리얼은 두 가지 일을 예상할 수 있.. 2022. 2. 23.
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장영희 문학 에세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샘터 2005 장영희 교수는 유방암의 전이가 척추암이 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동경의 대상이 되어 주었습니다. 젊었던 날들, 장왕록이라는 번역자의 이름을 자주 보았는데 장 교수가 그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신문의 칼럼에서 그 이름이 보이면 열심히 읽었습니다. 장영희 교수의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은 왜 그랬는지 읽다가 말았고, 독자들이 '아, 이 책을 한 번 읽어 보고 싶다' 하고 도서관이나 책방을 찾도록 해 달라는 신문사의 주문으로 쓴 칼럼을 엮었다는 이 책은 아예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자벨, 삶이 더 좋은 거야. 왜냐하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죽음은 좋은 거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2021. 12. 6.
먼산 바라보기 온갖 것들은 애써 외면하고 산만 골라서 바라본다. 나를…… 나에게 어떻게 해줄 수 없는데도 그렇게 한다. 언젠가 얘기해야지, 이렇게 갈 수가 없다고 한 것들이 쌓이고 쌓이고 해서 이젠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된 걸 저 먼산은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한두 가지라면 무용담삼아, 혹은 삶의 훈장을 보여주듯, 아니면 이젠 털어놓아야 하겠다며 그렇게 하지만, 정말이지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이 꼭 해결해야 할 일인데 그걸 할 수가 없어서, 자신이 없어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다른 일에 집중하며 지냈으니까 허송세월을 한 삶이 된 것일까? 이것이 인간일까? 삶인가? 2017. 7. 6.
김사인 「노숙」 풍경의 깊이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 2015. 2. 25.
김성규 「우는 심장」 우는 심장 김성규 나를 죽이고 김이 나는 심장을 꺼내 가 라고 말하면 네 심장이 우는 소리 너를 저주할 거야 어떻게 살아가든 그날 나는 죽어서 사라졌어야 했는데 이제는 지쳐 죽지 못하고 술집을 전전하며 노래하네 우는 심장을 들고 노래하는 심장을 사세요! 누군가 나를 알아볼까 탁자 밑에 손을 숨기고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너는 나에게 묻지 미안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나는 할 수 없이 살아졌던 것이라고 심장 속에서 몸을 말고 잠을 자다 누군가에게 심장을 팔러 걸어갔지 냄비에 넣어 오래 요리하면 핏물을 뱉어내며 웃는 심장 심장은 나에게 묻지 왜 아직 살아 있는 거지 나는 할 수 없이 사라졌던 것이라고 술잔을 비울 때마다 심장이 우는 소리로 나에게 노래했지 나를 저주할 거야 어떻게 살아가든 형편없는 가격.. 2013. 1. 3.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Ⅲ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Ⅲ 정영란 옮김, 민음사 2011 신부님에 대해 세 번째 얘기를 씁니다. 자꾸 쓸 수도 없고, 그래서 이 얘기를 쓰고 그만 쓴다고 생각하니까 섭섭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신부님께서 너무나 멋진 분이기 때문이며, 돌아가셨다는데도 현존하는 인물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 '아무렇게나'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사실은 그만큼 하고 싶은 일은 많았습니다. 우리의 국방이 어려울 때는 '내가 만약 군인이 되었다면 같은 대안(代案)을 내었을 텐데……' 싶었고, 정치가 엉망인 걸 보면 '아, 정말 치사하게…… 그래, 바로 정치가가 되어야 했어.' 싶었고, 사회 정의가 구현되지 않는 걸 보면 판검사가 되지 못한 게 한스러웠고, 돈이 최고인 걸 실감하는 날.. 2012. 2. 22.
조 은 「적운」 적 운 조 은 여자가 뛰쳐나오자 대문이 어금니를 물었다 밖에서는 이제 문을 열지 못한다 뒤돌아보는 여자의 머리에서 헝클어진 바람이 뛰어다닌다 부스스한 머리가 할 말 많은 혀처럼 꼬이는 여자의 그림자를 청색 분뇨차가 뭉개며 달려간다 아이들이 그림자의 허리에서 파편처럼 튄다 여자는 제 그림자 한복판에다 가래침을 뱉는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바퀴에 끌려 올라가던 그림자의 머리채가 한 걸음도 못 가 맥없이 놓여 난다 꼼짝 않고 노려보던 데서 시선을 옮긴다 여자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이 떨린다 콧날이 꿈틀댄다 여자가 뛰쳐나온 대문 안에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슬리퍼 끌리는 소리 수돗물 시원하게 쏟아지는 소리 꿈쩍 않는 평온의 소리가 들린다 여자가 눈을 뜬다 ─────────────── 조 은 1960년 경북 안동 .. 2011. 3. 28.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Ⅳ 여기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은 어쭙잖은 처지에서 당연한 것이지만, 속아서 오시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령 검색창에 "아름다운 육체" "누드"와 같은 단어를 넣어서 오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까미유 끌로델과 로댕 이야기 때문에 이 블로그를 찾게 되고 낭패감을 맛보며 돌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낭패감으로 말하면 다른 예도 많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학생이 '시지프스가 누구지?' '시지프스의 신화가 뭐지?' 단순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서 검색을 하게 되어 찾아오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시지프의 신화』 Ⅰ Ⅱ Ⅲ을 다 살펴도 분명한 답을 얻지 못하는 헛수고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그 학생을 위해서 『시지프의 신화』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보며 알베르.. 2010.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