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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장실9

스물여덟 살 친구 같은 아이 이 아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제자? 글쎄요... 그렇게 부르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요. 제가 교장일 때 만난 아이예요. 교장실에 들어와서 이야기하고... 누가 결재받으러 들어오면 부탁하지 않아도 저만치 떨어져 뭔가를 살펴보고... "그럼 제자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이렇게 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교장이라고 해서 그 학교 아이들을 다 제자라고 하나요?" 그럼 부끄러워지지 않겠어요? 요즘은 담임을 했어도 선생 취급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그럼 친구? 나이 차가 엄청 많이 나는 친구? 어쨌든 나는 좋습니다. 그 아이를 제자라고 하면 과분하긴 해도 나는 좋고, 왠지 친구 같은 느낌도 있으니까요. 결재 좀 해달라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가온 것도 아니고, 굳이 뭘 좀 가르쳐달라고.. 2022. 12. 1.
창밖의 풍경 젊었을 땐 창밖의 풍경도 내다보지 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광화문 정부중앙청사에서 지낸 그 오랜 세월에는 18층 창 너머로 인왕산의 사계(四季)와 인파, 자동차 물결, 전광판들, 시위대의 모습 같은 것들을 자주 내려다보며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찾아간 곳이 2004년 9월 1일의 용인 수지의 성복초등학교였습니다. 그 학교 1층의 교장실에서는 송화가루가 날아들고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그 앞의 나지막한 동산을 내다보며 시름을 달랬습니다. 아침에 교장실에 들어가면 귀뚜라미가 울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서는 몇 명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이 공부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시간에 교장실의 열려진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면서 "오빠! 뭐 해요?" 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까르르 웃으며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까페를 .. 2010. 4. 16.
2009 양지 학교운영위원회 위원들의 한때 ▲ (신문에 실린 사진처럼 설명해보겠습니다.) 남양주양지초등학교 2009학년도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위원 및 지역위원 들이 그들의 뜻에 따라 학교를 운영하려고 노력해온 ○○○ 교장과 함께 지난 2월 25일(목) 오후 2시 교장실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무종(부위원장)·김정희·김수경·염정남(위원장)·○○○·정정희·이정옥 위원. ▲ 김수경 위원님께 : 이것저것 여러 가지 일을 다 부탁하고 다 시켜놓고, 기념사진 찍을 때는 '턱'하니 앞을 가로막고 서서 그 고운 모습 보이지도 않게 했으니 미안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날 키 큰 사람은 뒤에 서라고 한 사람이 저였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지난 2월 25일이면, 저로서는 교장으로서의 '볼일'이 사실상 끝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며칠 전, 위.. 2010. 3. 4.
어느 학부모의 작별편지Ⅱ 교육경력 41년의 마지막 한 주일 중 화요일이 가고 있습니다. 오전에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 이사회에 나갔고, 오후에는 그 재단에서 발행하는 계간 『교과서연구』지 편집기획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그 위원회는 제가 위원장입니다. 아직은 교장이니까 '출장'이고 이런 출장은 '여비 기권'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교육부 직원이나 대학교수, 연구기관 학자 등 여러 사람들이 "교장선생님" "교장선생님" 하고 불러도 아직은 어색하지 않지만, 며칠 후면 당장 달라질 것입니다. 아직도 저를 보고 옛날처럼 "과장님" 혹은 "장학관님" 하고 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색한 것은 당연합니다. 쑥스러운 편지를 한 번 더 소개합니다. 이런 소개도 이제 앞으로는 없을 것입니다. 교장선생님께 안녕하세요. 학부모 대표 ○○○.. 2010. 2. 23.
이상한 교장할아버지 지난봄 어느 날 교장선생님과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2학년 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지나가다가 큰소리로 인사를 했다. “교장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웃음이 나면서도 당황스럽기도 했다. 언짢아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미소 짓는 모습을 보고 의아하기도 했고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 교장선생님은 ‘이상한’ 교장할아버지다. 근엄한 교장이 아니라 한없이 편안한 시골할아버지다. 아이들 교과서 뒷장에 나오는 편찬·심의위원이기도 한 우리 교장선생님은 오늘도 한국교원대학교에 교장자격연수 강의를 하러 갔다. 한 달에 두세 번 교장, 교감, 전문직 자격연수나 직무연수에 강의를 다닌다. 그러나 1년 가까이 함께 지내면서 이런 대외적 지위나 평판보다 더 커다란 것을 보고 느끼면.. 2009. 11. 10.
교장실 연가(戀歌) Ⅱ 열차 안 TV에서 「경기 초등교 교장실 인테리어에 2년간 36억원 ‘펑펑’」이라는 스포트 뉴스를 봤습니다. 민망했습니다. 교장실을 제 방인 양 꾸미고, 고급 양탄자를 깔고, 온갖 것 다 갖다놓고, 그렇게 해놓고 앉아 있는 걸 ‘꼴사납다’고 본 어느 의원(혹은 위원)이 최근 2년간 교장실을 꾸미는 데 들어간 예산을 조사했을 것입니다. 저는 어느 곳에서든 가 앉게 되면, 우선 떠나야 할 시간부터 계산하며 살아왔습니다. ‘이걸 차려놓으면 떠날 때는 어떻게 하나?’……. 이 학교에 와서 반 년 간 지낸 1층의, 인테리어가 제법인 그 교장실을 교감실 및 회의실로 정하고 -선생님들이 교장실보다는 더 많이 이용하는 방이 교감실, 회의실이므로- 지난해 3월에 2층의 지금 이 방으로 올라왔습니다. 행정실에서 뭘 좀 차려.. 2009. 10. 28.
교장실 연가(戀歌) Ⅰ 가을 독서축제 때 잘한 아이들에게 상을 주었습니다. 몇 명만 조회 때 주고 쉬는 시간마다 학년별로 수십 명씩 교장실에서 주었습니다. 공연히 힘들인다고, 힘들게 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기분 좋고, 재미도 있습니다. 내가 상장을 준다는 것이 자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상장을 주고 꼭 악수까지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상장 끝에 내 이름이 있으니까 내가 직접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참 볼품 없는 교장이지만, 내 방을 다녀간 그 아이들 중에 혹 자부심을 갖게 되고, 혹 내 방에 와서 상장 받은 일을 오래 기억하고, 혹 다음에 또 내 방에 올 일을 만드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참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사진은 L 선생님이 찍었습니다. 사진을 참 잘.. 2009. 10. 12.
어디가 대한민국입니까? 누가 대한민국입니까? 덥습니다. 지난해 여름에도 그 무더위를 참느라고 용을 썼습니다. 그럴 때는 “우리나라는 사철이 있어 참 좋다”는 말에 공감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라집니다. 옛날 그 좋던 여름날을 그리워하면서 ‘내년엔 이렇진 않겠지. 그렇지 않으면 아내가 뭐라 하든지 집에도 꼭 에어컨을 달아야지.’ 그런 생각이 절실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선풍기도 돌리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더울 때는 사위가 갖다 준 에어컨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만 것이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무더위가 올해는 더 일찍 시작되었습니다. 밤이 깊어도 바람 한 점 불어주지 않으니 지난해보다 외려 더 혹독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평년기온? 좋아할 것 없다. 인간들이 보다 편안한 생활, 보다 편리한 생활을 추구하려는 .. 2008. 7. 11.
"차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80 "차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학교에서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학부모님들은 물론 집배원도 오고 더러 물건 팔러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해진 날짜에 정기적으로 꼭꼭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방 안전 점검, 전기 안전 점검, 상수도나 도시가스 검침, 정수기 점검, 행정실과 급식소 물품 조달, 컴퓨터 및 관련 시설·설비 보수 같은 일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학교에 오면 교장인 제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모습을 보아 저 사람이 교장이겠구나' 하고 알은 체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지나쳤고 '담당 직원을 만나 볼일을 보면 그만'이라는 듯한 표정들이.. 2007.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