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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차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80

 

 

"차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학교에서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학부모님들은 물론 집배원도 오고 더러 물건 팔러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해진 날짜에 정기적으로 꼭꼭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방 안전 점검, 전기 안전 점검, 상수도나 도시가스 검침, 정수기 점검, 행정실과 급식소 물품 조달, 컴퓨터 및 관련 시설·설비 보수 같은 일로 오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학교에 오면 교장인 제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모습을 보아 저 사람이 교장이겠구나' 하고 알은 체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그냥 지나쳤고 '담당 직원을 만나 볼일을 보면 그만'이라는 듯한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좀 실망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일일이 인사하고 싫든 좋든 몇 마디 의례적인 대화라도 나누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는 것에 차라리 잘 되었다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소방시설을 점검하는 사람 같으면 점검을 나올 때마다 화재자동탐지 설비, 경보 설비, 피난 설비, 옥내 소화전, 간이 소화용구, 수원과 스프링클러, 분말 소화기 같은 것들을 점검하고, 예를 들어 소화기 같으면 '점검표에 검사기일이 기재되어 있는가', '본체에는 검정인이 탈락되지 않았는가', '사용방법 및 적응화재 표시는 되어 있는가' 등등 수많은 점검 내용에 따라     표시를 하고 점검결과에 따른 조치사항을 기재하여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매번 교장을 찾아와 "이번에는 뭐를 하러 왔소" "점검해보니 뭐가 어떻소" 하기에는 피차 귀찮을 것이 뻔한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저는 아직까지도 학교에 오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잘 "들어오시지요. 차라도 한잔……" 어쩌고 해서 "그러자"기도 그렇고 "시간이 없습니다" 혹은 "싫습니다" 하기에도 뭣한 궁지로 상대방을 몰아넣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교장실과 행정실이 붙어 있어 때로 음료수나 다과 같은 함께 나누어 먹을 때 방문객이 오면 저는 여지없이 그를 불러 억지로라도 합석하게 하는데, 그럴 때의 그들의 태도나 표정을 보면 매우 번거로워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앉으시지요."

"괜찮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앉으세요."

나이 지긋한 교장이 앉으라는데 그들이 어쩌겠습니까. 자꾸 권하면 앉아야지요.

"좀 드십시오."

"괜찮습니다."

"아, 그러지 마시고 좀 드세요."

그러면 할 수 없어서 한번쯤 먹을 수밖에요. 그러나 작정한 듯 대어들어 더 먹기도 뭣하고 하여 엉거주춤 어색하게 그냥 앉아 있습니다.

"더 드세요."

"괜찮습니다."

하기야 괜찮겠지요. 무슨 탈날 일이야 있겠습니까. '학교에 가면 뭐를 좀 얻어먹어야지' 하고 오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딱 한번 집어먹고 말면 또한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시쳇말로 입만 버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 참, 더 드세요."


이쯤 되면 그 방문객이 이상한 사람인지, 제가 이상한 사람인지 판단을 해봐야 할 지경이 됩니다. 우리 행정실 직원들까지 저 한번 쳐다봤다 그 방문객 한번 쳐다봤다 하며 어색한 표정이 됩니다. 그런데도 저는 오늘도 방문객이 눈에 띄면 또 그렇게 해야 하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다못해 허구한 날 찾아오시는 우리 학부모들께도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제대로 된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지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대체로 시골에 살았으니 지금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모를 심거나 논을 매거나 벼를 베거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점심 식사와 새참은 들판에서 했고, 그럴 때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무조건 불러 - 얼핏 보면 강제로 끌어와 -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저희 동네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들판 저 건너 산비탈로 지나가는 게 희끗희끗한 걸로 보아 짐승은 아니고 분명 사람이므로 목청껏 불러 그 음식을 나누어먹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나가다 불려온 사람들 중에서 "시간이 없다"는 사람이나 "왜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귀찮게 하느냐?"고 대어든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세상이 변하여 요즘은 우리가 자란 그 시골 마을에서도 핸드폰으로 커피도 시키고 자장면, 통닭튀김도 배달시켜서 먹는다니 이제 지나가는 길손을 불러 함께하기는 다 틀린 일 아니겠습니까?


저도 사실은 어린 시절의 그 일들을 기억해내어 방문객을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아무래도 그냥 보내서는 안 되지' 싶은 그 느낌만으로 그렇게 하고 있으니 그 버릇을 쉽게 고칠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교직원들과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던 옛날을 가르치고 싶은 것이 솔직한 제 마음입니다. 그러면 우리 학교 교직원과 아이들은 다 희한한 사람들이 될까요? 설마 "시간도 없는 사람을 왜 괴롭히느냐?" 혹은 "별 희한한 사람들 다 보겠네." 하고 미친 사람들 취급을 하지야 않겠지요?

 

 

2007년 4월 24일

                                                                                     

 

추신 : 모처럼 학교에 오시거든 차 한 잔 드시고 가십시오.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