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학교, 실패를 안정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곳 - 회장·반장 선거에 낙선한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79

 

 

 

 학교, 실패를 안정적으로 경험해볼 수 있는 곳

- 회장·반장 선거에 낙선한 아이들의 부모님께 -

 

 

 

   "부모에게는 어떻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모습보다는 눈에 거슬리고 부족한 면이 더 눈에 들어오는지요."

 

   '파란편지'의 답장 중에서 이 편지를 보고 생각난 것은 '자식을 잘 키우고싶다는 부모들의 욕심'이었고, 이어서 '이번 봄의 회장·반장 선거에 낙선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대했을까?'도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선된 아이의 가정에서는 외식을 하거나 파티를 열거나 최소한 특별한 칭찬이라도 하셨을 것입니다. 문제는 낙선한 아이의 경우입니다. "도대체 넌 하는 일마다……." 그러셨습니까, 아니면 "또 떨어졌니?" "이웃집 ○○이 좀 봐라. 그 애 반만이라도 해라." 그러셨습니까? 만약, 그러셨다면 지금이라도 새로운 대화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낙선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아이는 충분히 고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날 그 아이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얼마나 고독했겠습니까. 그 고독을 우리는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우리가 자란 그 시골 같으면 하굣길이 아득하게 멀어서 '터덜터덜' 걸어가며 온갖 생각 다 해보고 온갖 결심 다 할 수 있었지만, 성복동 하굣길은 그렇지도 않아서 스스로 생각해보고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집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데 다짜고짜 그렇게 나오셨다면 그 아이는 아무 말 않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해도 이중삼중 얼마나 마음 상하고 허전하고 주눅이 들었겠습니까.

 

  우리가 선거에 낙선한 아이들에게 그렇게 대하고 있다면 - 무시하거나 깔보거나 체념하게 하거나 심지어 그 아이의 생활을 불신한다면 - 그런 교육을 시키고 앉아 있는 저로서는 차마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경험이 교육적으로 값진 경험이 되게 해주고 있다면, 그렇다면, 학교라는 곳의 실패와 성공에 대한 경험은 매우 안정적이므로 가능하면 자주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도록 해주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개척정신이나 진취성, 창의성 같은 고급의 정신능력은 물론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지니고 태어난 온갖 욕구를 마음껏 발휘해보고 자신감이나 각오, 결심, 기대, 희망, 신뢰와 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그 수준을 높이 평가하는 덕목에 대한 긍정적인 학습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실패'라는 것은 긴 인생 여정에 비추어보면 결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며 실패에는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 우리는 잊어버리고 사는 것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이 '기초적인 사회(학교)'에서의 실패조차 허용하지 않으려 하고 이른바 '성공'만 되풀이하기를 기대하여 아이들에게는 가혹한 하루 하루가 힘겹게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퇴계 이황 선생의 과거 시험 낙방에 대한 일화를 들어보셨습니까? '퇴계' 하면 서울의 '퇴계로'도 생각나지만 천 원짜리 지폐에 그 초상이 있을 정도로 고귀한 인품과 학식, 경륜을 겸비한 어른이었습니다. 그분은 시詩와 주역周易에 몰두하여 건강을 해칠 정도로 학문에 정진하던 중 주변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몇 번의 고배를 마셨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문을 하는 공부와 시험을 잘 치르는 기교에 관한 공부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퇴계의 자당은 "과부의 자식은 배운 게 없고 버릇이 없다"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늘 걱정을 했고, 더구나 과거에 연이어 불합격하자 하인까지 자신을 '이 서방'이라고 부르는 것을 본 퇴계는 '이러다가는 사람 대접을 못 받겠구나' 하고 크게 분발하여 27, 28세에는 생원·진사를 뽑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습니다.

 

  이로써 이제는 다시 학문에 정진하려 했으나 자당과 형의 간곡한 권유로 비교적 늦은 34세(1534년)에 드디어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로서 관리로서의 첫발을 내디뎠고 이후 157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140여 회의 임명을 받았으며 약 80회의 사퇴 의사를 밝히는 등 두터운 신임을 받는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학자, 교육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유가(儒家)에서는 성현의 표상인 퇴계도 이와 같은 실패를 경험했으며, 평소 자신의 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어머니'라고 기록할 만큼 그 자당에 대한 회상을 깊이 한 것은 우리가 자식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 대한 사례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지만, 3천4백 종의 발명품으로 '발명왕'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가지게 된 에디슨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로, 전기를 발명할 때는 1만 번의 실험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한 에디슨도 초등학교에서는 저능아로 취급받아 퇴학을 당했으나 "이제는 내가 너를 잘 가르쳐주겠다"고 한 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생을 호기심과 노력으로 일관한 인물이 된 것 아니겠습니까.

 

  에스파냐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라는 철학자가 말했답니다. "삶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의 합계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망해 왔는가의 합계이다."

 

 

 2007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