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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언제, 책 사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76

 

 

 

언제, 책 사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디지털도서관의 내용이 날로 풍부해지는 세상입니다. 또 그 뜻이 모호한 단어가 보이면 사전을 찾기보다 얼른 컴퓨터 화면의 '사전'을 '클릭'합니다. 여가에 책을 읽기보다 컴퓨터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도 많습니다. '이거 참…' 싶어도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에서 '2006년을 빛낸 독서왕' 발표를 발견했습니다.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한 실적을 집계했더니 어느 아이는 무려 226권을 읽었고 10위가 65권을 대출해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65권만 해도 대단합니다. 제 독서록에는 50권이 안 되는 해가 대부분입니다. 많이 읽는 것만 좋은 것이 아니고 잘 읽는 것 또한 중요하며 같은 책이라도 사람에 따라 감흥이 다르므로 무턱대고 읽은 양만 따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상은 이럴 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확고하여 그 열 명에게 '다독상'을 주었습니다.


그제는 폭우도 쏟아졌지만 충남 당진이라는 곳에 갔습니다.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 볼일이어서 차를 세워두고 서점을 찾았습니다. 길모퉁이 시골 서점에는 손님이 별로 없어서였는지 제가 난생 처음으로 그 서점을 방문한 것이 좀 미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장님, 좀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진짜로 인사를 할 뻔했습니다. 그 서점 주인은 마치 언제든 제가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대를 이어가며 60여 년을 기다린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산다'는 일은 저에게는 언제나 사치스런 일입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그보다 값이 몇십 배나 더 나가는 물건을 사도 그런 느낌을 갖지 않는데, 유독 책을 살 때는 '내가 이런 사치를 하는구나' 싶습니다. 굳이 사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만 원짜리 한 장으로도 골라서 살 수 있는 좋은 책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주 밥도 사고 전화도 연방 해대고 그러면 세상 살아가기가 더 좋을 텐데, 허구한 날 이 책상에 앉아 책이나 읽고 있으니 별 볼일 없는 일생이 되었다는 자책감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책을 읽으면 이 생각 저 생각 현실을 떠난 세상을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고, 이제 남들은 "9988!!!"을 외치거나(참 어처구니없고, '오죽하면' 싶어서 동정심이 가는 구호지만) 정년 후의 삶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에 열심인데 아직도 책이나 읽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순간'이 너무나 좋고, 다시 태어나도 책이나 많이 읽었으면 더 좋겠고, 휴일에 전철을 타고 예식장에 갈 때 앞사람이나 쳐다보아야 하는 빈손인 경우가 아주 곤혹스럽고도 허전합니다.


책을 읽으면 뭐가 그리 좋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느니, 책을 읽으면 교양과 지식이 풍부해진다느니 하는 말을 저는 아직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이 세상에 책이 있다는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일 뿐입니다. 책이 있어서 이 세상이 좋습니다. 책은 멋있는 물건입니다. 이사를 할 때 보면 어떤 물건이든지 잘못 놓으면 당장 어색하기 마련인데 책은 아무렇게나 꽂아두어도 보기에 좋고, 심지어 책장에 정리하지 않고 쌓아놓기만 해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래서였는지 한때는 부자들이 고급스런 책장을 사서 표지가 금박으로 된 책들을 많이 모아두고는 읽지는 않는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책을 도자기나 가구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읽지도 않으면서 밖에 나갈 때만 들고 다니는 꼴은 아주 혐오스럽습니다. 책은 또 책상에서 읽어도 좋지만 침대나 거실 바닥이나 부엌이나 자동차 안이나 공원이나 어디에서 읽어도 좋습니다. 그 점이 컴퓨터와 다릅니다. 컴퓨터 마니아mania라면 무선 노트북 이야기를 하겠지만 책을 만지고 넘기고 살펴보는 맛은 컴퓨터와는 영 딴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책은 얇으면 얇은 대로 두꺼우면 두꺼운 대로 그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요즘은 장정裝幀이 워낙 잘 되어 나오기 때문에 저는 그 책의 장정부터 한참동안 살펴보고 읽기 시작합니다. 남이 들고 있는 책의 장정이 아름다우면 도대체 어떤 책인지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책은 또 그것 한가지로 다 해결됩니다. 뭐든지 한가지만으로 해결되는 건 거의 없습니다. 가령 무슨 메모라도 하고 싶을 때도 꼭 종이와 볼펜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책은 또 선물로는 '그저 그만'입니다. 누구나, 주었거나 받았거나, 주고받은 일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선물하듯 구입한 한두 권의 책에 얽힌 저 유년기의 추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책을 선물했을 때 시답잖아 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런 사람은 아예 상대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책은 또 읽고 나서 그 내용을 꼭 기억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그 내용들을 다 기억해야 한다면 저는 앞으로는 단 한 권도 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들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자녀에게 책을 선물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다음에는 언제 선물하시게 됩니까? 혹 다른 가족 - 남편이나 부인 - 에게 책을 선물하실 의향은 없습니까? 아직 책을 선물하신 적이 없다면 참 좋아하시겠지요. 자녀와 함께 서점에 가신 것은 언제입니까? 다음에는 언제 함께 가셔서 책을 사 주실 작정입니까?

 

 

2007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