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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파란편지 모음 2

체벌과 아이의 자존심

by 답설재 2007. 8. 29.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75

 

 

 

체벌과 아이의 자존심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여름날, 매를 맞을 네댓 명에 들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지금도 모릅니다. 담임은 다짜고짜 각자 몽둥이를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너무 가느다란 건 불리할 게 뻔했습니다. 주룩주룩 내리는 그 비를 맞으며 학교 뒤 아카시아 숲을 향해 뛰었습니다. 우산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빗물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지는 몰랐습니다. 제 자존심도 빗물과 함께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게 뛰었지만 칼을 가진 아이가 단 한 명이어서 그 빗속에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그 기억이 강하여 그날 얼마를 맞았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유만 알면 좀 맞는 것쯤은 괜찮습니다. 5·6학년 때는 다시 늘 상장, 표창장을 받았고 아무도 저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저는 제 권위를 좀체 회복시켜주지 않았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따위를 잘 외는 것은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6학년 담임은 "뽑혔으니 당연히 네가 반장"이라고 했지만 그 봄날 교정의 벚나무 아래로 어둠이 내려도 '권위도 없는 내가 무슨 반장이냐?'고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그 기억을 챙기며 교사가 되었고, 드디어 그때 그 담임을 만났습니다. 술에 취하여 어깨동무를 한 채 댁까지 배웅하며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는 그때 왜 말썽꾸러기였습니까?" 늦게라도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는지, 제가 참 모진 성격인지 모르겠습니다.

 

말썽을 피우는 아이는 있기 마련이며 그래서 우리들 교사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경기도 어느 지방지의 '시론'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학교가 할 일, 교육부가 할 일

 

 

 

교사에게는 때로는 학생을 좀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싶은 간절한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체벌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체벌이란 어떤 것인지 교육부 정의를 보면 '교사가 학생에게 물리적 도구나 신체의 일부를 이용하여 직접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지도 행위'와 '교사가 학생에게 간접적인 방법으로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지도 행위'로 나누고 있다.

 

또한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라는 분명한 전제조건이 있으며, 더구나 초·중등교육법시행령(제31조제1항)을 근거로 각 학교에서 제정한 학칙의 징계에 해당하는 행위라고는 하지만, 이미 그 행위에 대해서도 일일이 예시되고 있다.

'교사의 훈계 내용을 이유 없이 반복하여 어길 경우' '학습태도의 불성실, 태만으로 교사의 반복적인 지도에도 변화가 없을 경우' '남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신체·정신·인격 또는 물품 등에 손상·손해를 끼치는 경우' '선도규정상 징계사항이지만 그 정도가 경미하여 징계에 회부하기가 곤란한 경우' '훈계 등의 방법으로 교육적 지도를 반복하여도 효과가 없을 경우'이다.

또 이러한 행위에 해당한다 해도 '학생 및 학부모의 권리에 입각한 사법적 판단을 전제할 때, 사회통념상 행위자 귀책사유가 없는 수준'이어야 하며 학칙으로 정한 절차와 형식(수단, 도구)을 따라야 한다는 기준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정부의 학생 체벌에 관한 법규와 지침이 이와 같다. 물론 원칙적으로 체벌을 하지 말자는 취지이기는 하지만 예시된 행위와 기준을 검토하고서도 구태여 체벌을 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40만 교원 중 한두 명이 또 이 규정을 어기고 체벌을 한 것이 드러나게 되면 교육부에서는 재빨리 나서서 그 상황을 파악하고 이 지침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는 궁리를 하는 것이 우리 교육행정이다.

 

이처럼 교육부가 잘 나서는 경향의 이면을 보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우리의 특징이다. 국민들은 웬만하면 당장 장관을 찾으며, 예를 들어 수능부정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당연한 듯 부총리인 장관이 물러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걸핏하면 장관을 찾는 나라이고 걸핏하면 장관이 나서는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이 지적이 못마땅하다면, 피터 드러커(2002)가 '일본의 통치집단은 관료주의를 충실히 따르고 있으므로 그들은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한다'고 한 것에 비해 우리의 관료들은 어떤 성격의 관료들인가, 예를 들어 아랫사람은 안 된다고 한 것을 그 위에서는 된다고 하거나 그 상하(上下)가 힘을 합쳐 감시·감독, 규제, 통제와 같은 저급한 수단을 동원한 사례는 없는지, 그렇게 했기 때문에 걸핏하면 가장 큰 힘을 가진 장관을 찾게 된 것이 아닌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실제로는 옛날부터 내려온 영장류의 의식적인 성교형태라는 사실을 선생님들이 완전히 이해한다면, 그래도 체벌을 계속할지 의심스럽다"고 한 데스먼드 모리스의 말을 강조하는 동안, 위에서는 법규를 정교히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상하가 맞지 않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잘 가르친다는 것은, 규제하고 단속하는 데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워도 기본과 예의를 애써 가르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동안 위에서는 "교원들은 법규를 잘 모른다. 법규를 잘 보라!"고 호통 친다면 그것을 수준 높은 교육행정이라고 대답해주기가 어렵다. 체벌을 포기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함께 교육까지 포기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예를 들 수도 있다. 올봄에는 교복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교복값이 논란의 핵심이지만 이른바 'S라인'을 강조하고 선망의 대상인 탤런트를 동원한 선전도 문제가 되었다. 성형수술, 보톡스 주사, 화장품 소비가 세계 1위인 나라지만 '모름지기 학생들은 그러면 못쓴다'고 하면 한때 교복을 없앴던 때의 논의로 되돌아가야 하거나, '학교는 본래 인간을 규격화하는 곳으로 교과서 외에는 별로 가르칠 수 없을 것'이라는 학교교육 경시 관점이 너무 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나저나 이 문제로 교육부가 이번에는 나서지 않았다면 다행이지만, 정말 나서지 않았다면 "뭐하고 있나, 교육을 포기했느냐!"는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교육은 학교가 하게 하고, 교육부는 학교를 적극적으로 돕는 것이 더 좋다.

 

 

2007년 3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