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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강변 이야기10

정호승 「폭설」 폭 설 정호승 폭설이 내린 날 칼 한 자루를 들고 화엄사 대웅전으로 들어가 나를 찾는다 어릴 때 내가 만든 눈사람처럼 부처님이 졸다가 빙긋이 웃으신다 나는 결국 칼을 내려놓고 운다 칼이 썩을 때까지 칼의 뿌리까지 썩을 때까지 썩은 칼의 뿌리에 흰 눈이 덮일 때까지 엎드려 운다 출처 : 정호승, 『밥값』(창비, 2010), p.88(『현대문학』 2012년 4월호, 「텍스트에 포개 놓은 사진」에서) 그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얼마나 후련하겠습니까. 그 아름다운 분도 기특해하시고말고겠지요…… 울다가 가렴. 울지 않고 어떻게 갈 수 있겠니. 그래봤자 그 칼의 뿌리가 썩어 가서, 썩은 그 곳에 오늘 같은 폭설이 덮일 때까지인데, 잠깐일 텐데 그렇게 좀 울면서 너를 찾으렴. 그러셨을까요? 해마다의 이런 폭설을 겪.. 2012. 12. 5.
영혼과 영원 나는, 초인간적인 행복은 없다는 것과 일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영원은 없다는 것을 배운다. 이 얼마 안 되면서도 본질적인 부속물들, 이 상대적인 진실들은 나를 감동시키는 유일한 것들이다. 다른 것들, 즉, 인 진실들에 관해서는, 나는 그러한 것들을 이해할 만한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 인간이 짐승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천사들의 행복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하늘이 나보다 더 오래 영속될 것임을 알 뿐이다.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도 지속될 것 말고 그 무엇을 영원이라 부르겠는가? - 알베르 까뮈, 「알지에에서 보낸 여름」(철학 에세이) 중에서 (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 육문사, 1993, 부록 197~198쪽). 블로그 『강변 이야기』(2012.2.6.. 2012. 5. 1.
송수권 「내 사랑은」 내 사랑은 송수권 저 산마을 산수유꽃도 지라고 해라 저 아랫뜸 강마을 매화꽃도 지라고 해라 살구꽃도 복사꽃도 앵두꽃도 지라고 해라 하구쪽 배밭의 배꽃들도 지라고 해라 강물 따라가다 이런 꽃들 만나기로소니 하나도 서러울 리 없는 봄날 정작 이 봄은 뺨 부비고 싶은 것이 따로 있는 때문 저 양지쪽 감나무밭 감잎 움에 햇살 들치는 것 이 봄에는 정작 믿는 것이 있는 때문 연초록 움들처럼 차 오르면서, 해빛에도 부끄러우면서 지금 내 사랑도 이렇게 가슴 두근거리며 크는 것 아니랴 감잎 움에 햇살 들치며 숨가쁘게 숨가쁘게 그와 같이 뺨 부비는 것, 소근거리는 것, 내 사랑 저만큼의 기쁨은 되지 않으랴. ☞ 『한국경제』 2012.3.12.A2면. 「이 아침의 시」(소개 : 고두현 문화부장·시인(kdh@hankyung.. 2012. 3. 13.
최하림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최하림(1939- )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만약 올해의 입동(立冬) 소설(小雪)을 지나 '이젠 정말 춥구나' 싶을 때 우리에게 다시 겨울이 온 걸 느끼고 인정하는 시 한 편.. 2011. 12. 15.
가을엽서 11 강원도 어느 곳에 얼음이 얼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가을'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있습니다. 올 가을에는 보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잠시라도 떠나는 시간에는 떠나는 그 곳을 눈여겨 봅니다. '꼭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젊은날에는, 아니 연전(年前)에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돌아오지 못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세상의 얼마나 많은 것들이 보고 싶겠습니까. 2011. 10. 20.
전경린 『강변 이야기』 『現代文學』 2010년 10월호에서 단편 「강변마을」(전경린)을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동화 같은 그 소설은, 당장 제 친구 블로그 『강변 이야기』가 생각나게 했습니다. 요즘은 다른 매체들의 발달로 주춤한 느낌이지만 블로그(blog) 운영으로 생계를 삼아도 되겠다 싶은 블로거(blogger)를 더러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이윤을 추구하는 '브로커(거간, 중개인, 중개상인, 혹은 정말로 더러 사기성이 있는 거간꾼)'도 있고, 이렇게 블로그에 매달려서 먹고 살기는 뭘 먹고 사나 싶은 '순수파' 블로거도 있습니다. 물론 삶의 향기를 전해주는 블로거, 잡기로, 혹은 무슨 캠페인 같은 걸로, 세상의 진기하거나 잡다한 자료를 구해서 보여주는 일로, 소일을 하거나, 낙을 삼거나, 이것 좀 보라고 강요하다시피 .. 2011. 8. 31.
아포리즘, 까칠한 눈으로 보기 아포리즘(aphorism), 까칠한 눈으로 보기 ◈ 자주 찾아가보는 블로그 『奈良 blue sky』에서 노자의 인간관계론을 정리해놓은 것을 봤습니다. 블로그 주인은 좋은 인간관계를 인생의 윤활유라 전제하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주나라의 궁중 도서실의 기록계장(도서관리인)이었다가 후.. 2011. 8. 1.
아름다움의 추방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방해 왔지만,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위해 무기를 들었다. 이것이 첫 번째 차이이나, 여기에는 어떤 내력이 있다. 그리스 사상은 언제나 한계의 개념 뒤에서 은신처를 구했다. 그리스 사상은, 신적인 것이든 이성적인 것이든 그 어떤 것도 극단으로 이끌고 가지 않았다. 그것은, 그리스 사상이 신적인 것도 이성적인 것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사상은, 그늘과 빛을 조화시켜 가면서 모든 것을 고려에 넣었다. 반면에 우리 유럽은 완전성을 추구하다가 탈이 난 불균형의 자식이다. 유럽은, 자신이 찬양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나 부정하듯, 아름다움을 부정한다. 그리고 온갖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서, 유럽은 단 한 가지만을 찬양하는데, 그것은 미래의 이성(理性)의 지배이다. 유럽은 미쳐서 영원한 .. 2011. 6. 29.
金春洙 「千里香」 千里香 꽃망울 하나가 가라앉는다. 얼음장을 깨고 깊이 깊이 가라앉는다. 어둠이 물살을 그 쪽으로 몰아붙인다. 섣달에 紅疫처럼 돋아난 꽃망울, 저녁에는 함박눈이 내린다. 마을을 지나 잡목림 너머 왔다 간 사람은 아무 데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한다. 『金春洙詩選2 處容以後』(민음사 오늘의 시인 총서, 1982), 76쪽. 봄입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부정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난 2월 둘째 주 주말에만 해도 전국적으로 폭설이 내린 곳이 많았습니다. 동해안에는 백몇십 년 만에 처음 그렇게 많은 눈이 내려서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당시 불친 "강변 이야기"에 실린 사진입니다. 부치지 못했던 오랜 추억을 기억하던 편지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그분은 이 사진 아래에 오석환의 시 .. 2011. 3. 6.
남진우 「꽃구경 가다」 꽃구경 가다 남진우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엔 으레 저승사자가 하나씩 붙어 있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 다가가면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 꽃그늘에 앉아 잠시 숨 고르고 꽃들이 내뿜는 열기 식히노라면 저무는 하늘에 이제 마악 별이 돋아나고 내가 가야 할 길 끝에 환히 열린 꽃마당이 보인다 저승 대문 닫히기 전 저 꽃마저 보지 않으련 은근히 속삭이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 2011.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