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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아포리즘, 까칠한 눈으로 보기

by 답설재 2011. 8. 1.

 

 

 

 

 

아포리즘(aphorism), 까칠한 눈으로 보기

 

 

 

 

 

  자주 찾아가보는 블로그 『奈良 blue sky』에서 노자의 인간관계론을 정리해놓은 것을 봤습니다. 블로그 주인은 좋은 인간관계를 인생의 윤활유라 전제하고,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노자(老子)는 주나라의 궁중 도서실의 기록계장(도서관리인)이었다가 후에 궁중 생활이 싫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노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노자의 '도덕경'에 나타난 사상에서 인간관계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고 한다.

 

  ▶ 진실함이 없는 아름다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 말 많음을 삼가라.

  ▶ 너무 아는 체하지 말라.

  ▶ 돈에 집착하지 말라.

  ▶ 다투지 말라.

 

  저는 이 다섯 가지 목록의 설명을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그렇겠구나!' 했습니다. 그렇다고 '아, 이건 나도 꼭 지켜야지!' 그렇게 결심하거나 ○×△표를 하며 반성해 보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더구나 '헛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훌륭한 옛 철학자가 한 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경스런 일일지 모릅니다.

 

 

 

 

  거의 매일 오는 『○○○의 행복한 경영 이야기』라는 이메일 자료에는 짤막짤막한 인용에 이어 그 파일을 만드는 분의 해석이 곁들여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을 샅샅이 읽어보다가 지금은 때로는 앞쪽의 인용 부분만 읽어보기도 하고, 제목만 읽기도 합니다. 그 제목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나는 작은 꿈 대신 큰 꿈을 꾸었다.

  ▷ 태풍이 불면 물고기들은 잔치를 한다.

  위기(危機, crisis)라는 단어의 어원이 주는 교훈.

  ▷ 천재 모차르트, 그 위대함의 비밀.

  ▷ 직원일 때 주인이 되고 사장일 때 머슴 되기.

  낮에 꿈을 꾸는 사람은 위험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런 내용 중에는 식상하거나 이유를 설명하기 싫지만 무조건 싫은 것도 있습니다. 다 개인적인 취향일 것입니다. 그 중에 한두 가지가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작은 꿈 대신 큰 꿈을 꾸었다(201.7.22)

 

위대한 기업을 세우고자 한다면 위대한 꿈을 가질 용기가 있어야 한다.

작은 꿈을 꾼다면 어떤 작은 것을 이루는 데는 성공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광범위한 영향력과 영구적인 가치를 얻고 싶다면, 담대해져라.

If you want to build a great enterprise,

you have to have the courage to dream great dreams.

If you dream small dreams, you may succeed in building something small.

For many people, that is enough.

But if you want to achieve widespread impact and lasting value, be bold.

-하워드 슐츠(Howard Schultz)

 

 

직원일 때 주인이 되고 사장일 때 머슴 되기(2011.7.28)

 

임원이 되기 전까지는 항상 회사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도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주인의식이다.

경영자가 된 지금은 오히려 스스로를 직원들을 섬기는 머슴이라고 생각한다.

직원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즐겁다. 이것이 머슴정신이다.

CEO가 머슴이 되면 직원들이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투어 권희석 사장

 

 

 

 

  조심스럽긴 하지만, 글쎄요. 모두들 큰 꿈만 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상은 오히려 황당한 사람으로 넘쳐나게 되는 것 아닐까요? 야망을 가져라, 기왕이면 큰 인물이 되어라, 뭐 그런 거겠지만……

 

  회사 직원들이 모두들 그 회사의 주인이라는 의식을 가진다면 회사나 직원들이나 행복할 건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저 사장님은 한 번도 자신을 직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답니다. 그리고 경영자가 된 지금은 자신을 회사의 머슴이라고 여긴답니다. 자신이 직원이었을 때 그런 의식을 가졌던 것처럼 직원들을 그 회사의 주인으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멋진 사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CEO가 된 것이고, CEO가 되는 인물은 비범한 인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그런 의식을 가질 수는 없고, 그런 의식을 가지기를 기대하는 것도 그리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교장으로 살아 있을 때는 교사들에게 늘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학생들을 위해 있는 분들이지 저를 위해 있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사람이 바로 교장인 저입니다.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주인공이고, 우리들 중에서는 여러분이 주인공입니다. 학생들이 없다면 여러분이 필요없게 되고, 여러분이 없으면 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감명 깊다고 한 교사를 본 적이 없고, 감동했다는 표정을 짓는 교사를 본 적도 없습니다.

  '웃기고 있네. 잘난 체하기는…… 당신은 교장이니까 그렇게 얘기는 하겠지만 내가 속을 줄 아는가? 나도 교장이 되면 그런 말을 하고,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겠지.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교장이 아닐 뿐이지……'

  각자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을까요?

 

 

 

 

사진 출처 : 블로그 『강변 이야기』(2011.7.18)의 「강아지풀 보며」

 

 

 

  세상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대로 된 것 같고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지만 자고 나서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것일까요? 알베르 까뮈는 이렇게 썼습니다.

 

  여기 나무들이 있어 나는 그 울퉁불퉁한 외양을 알고 있고, 물이 있어 나는 그 맛을 느낀다. 이 풀들의 향내, 밤의 별들, 마음이 느긋해지는 저녁들──그 힘과 강함을 내가 느끼고 있는 이러한 세계를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의 그 모든 지식은 내게 이 세계가 내것이라고 확신시킬 만한 어떤 것도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내게 이 세계를 묘사하고 이 세계를 분류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당신은 이 세계의 법칙들을 열거하고, 지식에 목이 마른 나는 그것들이 진리임을 인정한다. 당신은 그 메카니즘을 분해하고, 나의 희망은 커져 간다. 마지막 단계에서, 당신은 이 신비롭고 다채로운 빛깔의 우주가 원자로 환원될 수 있으며 원자 자체는 전자로 환원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 모든 게 기분 좋으며, 그래서 나는 당신이 계속하길 기다린다. 그런데 당신은 내게 전자들이 하나의 핵 주위로 이끌리는 보이지 않는 어떤 태양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신은 이 세계를 내게 어떤 이미지로써 설명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시(詩)로 전락하고 말았음을 깨닫는다. 나는 결코 알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내가 분개할 틈이 있을까? 당신은 이미 이론들을 바꾸어 버렸다. 그래서 내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기로 했던 과학은 하나의 가설로 끝나고, 그 명료함은 비유 속으로 빠져들고, 그 불확실함은 하나의 예술 작품 속에서 해소된다. 내가 그러한 수많은 노력을 할 필요가 어디 있었던가? 이 언덕들의 부드러운 선(線)들, 이 괴로운 가슴에 닿는 저녁의 손길이 내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나는 나의 처음의 시발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과학을 통해 내가 현상들을 포착하고 그것들을 열거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임을 나는 꺠닫는다. 이 세계 전체의 높낮이를 내 손가락으로 더듬어 갈 수 있다 할지라도 나는 더 이상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확실한 것이긴 하지만 내게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어떤 묘사와, 내게 가르쳐 준다고 주장하지만 확실치 않은 가설들 중의 선택권을 내게 준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세계에 대해서도 이방인이며, 스스로 주장을 하자마자 곧 저절로 부정되는 사고(思考)로 무장했을 뿐이며, 내가 인식과 삶을 거부함으로써만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조건, 극복의 욕구가 그 공격에도 끄떡치 않는 벽들에 부딪치고야 마는 이러한 조건이란 대체 무엇인가? 의지를 적용시키는 것은 역설들을 야기시키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이 무념(無念)·무심(無心), 혹은 죽음의 체념에 의해 만들어지는 저 중독된 평온을 낳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35~36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