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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종이책이 사라진다 (Ⅰ)

by 답설재 2011. 7. 22.

서점의 땅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은 아름답다. 다른 곳을 보는 척, 책을 찾는 척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생각만 하며 세월이 흘러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한 사이 같은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게 된다.  종이책이 사라지면 그 젊은이는 무엇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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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둘쨰로 큰 서점 체인 보더스(Borders, 399개)가 사라진단다. 매각 협상이 결렬돼 오는 22일 청산 절차에 들어가고 9월에는 그 서점 4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른 회사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수위 업체 반스&노블스나 아마존닷컴과 달리 전자책으로 전향한 소비자들의 구미(口味)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표(마이크 에드워즈)가 사원들에게 보냈다는 고별 편지 내용은, 비장하긴 하지만 차라리 평범하다. "모진 풍파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1

 

더 비장한 건 출판인들의 우려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이제 보더스 대신 다른 서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책 대신 다른 오락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번잡한 도심 속의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책을 고르는 그 문화 행위를 그만둘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2  답답하고 애석한 것은, 그런 문화적 포만감 따위는 전자책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잠시만 기다려주면 전자책으로 종이책보다 오히려 더 좋은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달래는 전자책 전문가들의 회유와 장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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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의 종이책 전문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문학분야에서 가장 풍성한 곳은 고전 서가이다. 펭귄이나 옥스퍼드 '세계고전총서'가 즐비해 있다. 그 앞에 서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젊은 시절엔 도대체 읽고 싶은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인문학도가 읽어야 할 기본 도서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책을 다 구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없고 기력이 없다. 눈도 침침해져 눈감기나 먼산바라기를 틈틈이 해야 할 처지다. 뭐 누구를 놀릴 셈인가, 하고 딱 누구에게랄 것 없이 시비를 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도 책 보기는 돈이 제일 적게 드는 도락이니 담을 쌓을 수도 없다.

 

              유종호, 「광화문 언저리에서━황혼의 배회(유종호 에세이 제10회)」, 『現代文學』 2011. 11월호, 147쪽.

 

 

전자책을 읽는 방법을 배우기가 싫고, 생각나는 것이 종이책밖에 없는 신세로서는, 저 종이책 전문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가하다고 해야 할까, 위안을 삼을 만하다고 해야 할까?

 

한심한 점도 있다. 나는 이제 책 한 권을 들면 몇 날 며칠이 걸려도 끝내지 못한다. 책만 들면 눈이 아프고 저절로 감긴다.

그런데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은 그대로 남아 있고, 이 책만은 한번 읽어보자며 사들고 들어와 쌓아 놓기만 하는 책은 늘어나고 있다. 방심할 때나 정신을 차릴 때나 어김없이 나의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1. 『조선일보』2011.7.20.A21,「美 2위 서점 보더스, 새 주인 못 찾고 청산, 함께 흔들리는 책 생태계」 [본문으로]
  2. 위의 기사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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