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의 땅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은 아름답다. 다른 곳을 보는 척, 책을 찾는 척 그 모습을 훔쳐보다가, 생각만 하며 세월이 흘러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한 사이 같은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게 된다. 종이책이 사라지면 그 젊은이는 무엇을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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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둘쨰로 큰 서점 체인 보더스(Borders, 399개)가 사라진단다. 매각 협상이 결렬돼 오는 22일 청산 절차에 들어가고 9월에는 그 서점 40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른 회사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아예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이유는, 수위 업체 반스&노블스나 아마존닷컴과 달리 전자책으로 전향한 소비자들의 구미(口味)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표(마이크 에드워즈)가 사원들에게 보냈다는 고별 편지 내용은, 비장하긴 하지만 차라리 평범하다. "모진 풍파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1
더 비장한 건 출판인들의 우려다. 그들은 소비자들이 이제 보더스 대신 다른 서점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책 대신 다른 오락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소비자들은 번잡한 도심 속의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책을 고르는 그 문화 행위를 그만둘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2 답답하고 애석한 것은, 그런 문화적 포만감 따위는 전자책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잠시만 기다려주면 전자책으로 종이책보다 오히려 더 좋은 감각을 느낄 수 있게 해주겠다고 달래는 전자책 전문가들의 회유와 장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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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우리의 종이책 전문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문학분야에서 가장 풍성한 곳은 고전 서가이다. 펭귄이나 옥스퍼드 '세계고전총서'가 즐비해 있다. 그 앞에 서면 은근히 부아가 난다. 젊은 시절엔 도대체 읽고 싶은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인문학도가 읽어야 할 기본 도서조차 구할 수가 없었다. 거의 모든 책을 다 구해 볼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시간이 없고 기력이 없다. 눈도 침침해져 눈감기나 먼산바라기를 틈틈이 해야 할 처지다. 뭐 누구를 놀릴 셈인가, 하고 딱 누구에게랄 것 없이 시비를 걸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래도 책 보기는 돈이 제일 적게 드는 도락이니 담을 쌓을 수도 없다.
유종호, 「광화문 언저리에서━황혼의 배회(유종호 에세이 제10회)」, 『現代文學』 2011. 11월호, 147쪽.
전자책을 읽는 방법을 배우기가 싫고, 생각나는 것이 종이책밖에 없는 신세로서는, 저 종이책 전문가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한가하다고 해야 할까, 위안을 삼을 만하다고 해야 할까?
한심한 점도 있다. 나는 이제 책 한 권을 들면 몇 날 며칠이 걸려도 끝내지 못한다. 책만 들면 눈이 아프고 저절로 감긴다.
그런데도 다시 읽고 싶은 책은 그대로 남아 있고, 이 책만은 한번 읽어보자며 사들고 들어와 쌓아 놓기만 하는 책은 늘어나고 있다. 방심할 때나 정신을 차릴 때나 어김없이 나의 시간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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