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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다시 여름방학

by 답설재 2011. 7. 18.

 

 

 

다시 여름방학

 

 

 

  장마가 끝나자마자 햇볕이 강렬하고, 방학입니다.

  아이들에게 부대끼고, '지원'이라는 고운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행정에 시달리며 올해도 다시 반을 지낸 선생님들은 '벌써 여름방학이구나' 하기보다는 '아, 드디어 여름방학이구나!' 하기가 쉽습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합니다. 그만큼 열성을 다했고 힘들었으니까……

 

  방학이 없고 일 년에 겨우 사나흘만의 휴가를 얻어 그 기간을 황금처럼 여기는 직장인들이나 교육공무원들, 전문직들은, "내가 만약 한 달 이상의 방학기간을 보낼 수 있다면 그 기간에 무엇이든 한 가지를 이루어내겠다!"고 합니다. 그게 무어냐고 물으면 "책이라도 많이 읽고, 적어도 한 권은 직접 쓸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입장이 되면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공약(空約)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시간을 끌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그 시간에 이끌려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단조로운 생활의 나날 동안에는 시간이 우리를 싣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시간을 싣고 가야 할 순간이 온다. 우리는 미래에 살고 있다. <내일> <나중에> <네가 잘 되었을 때> <네가 충분히 나이가 들면 이해할 게다> 등 이러한 엉뚱한 말들은 놀랍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은 죽음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이 자기가 서른 살이 되었음을 인식하거나 그렇다고 말하는 때가 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젊음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의 위치를 시간과 결부시켜 정하는 셈이 된다. 시간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는 그 끝까지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한 곡선의 어떤 지점에 서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시간에 속해 있고, 자신을 사로잡는 그 공포에 의해 자신의 최악의 적을 알아보게 된다. 내일, 그는 내일을 갈망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그의 내부의 모든 것은 내일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 육신의 반항이 곧 부조리인 것이다.1

 

                                                알베르 까뮈/민희식 옮김, 『시지프스의 신화 Le Mithe de Sisyphe』(육문사, 1993), 27~28쪽.

 

 

 

  "그는 시간에 속해 있고, 자신을 사로잡는 그 공포에 의해 자신의 최악의 적을 알아보게 된다."?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일지 모릅니다. 그런 인식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온 천지에서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볼 수 있으므로 사방에 방학을 맞은 선생님들도 보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은, 사방에 정년을 맞이한 교장들의 이야기가 떠돌아 다닙니다. 대부분 비난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어려워하고 지겨워하던 자신, 그런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걸 모르고 지낸 자신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젊음은 그 자체가 '영광'입니다.

 

 

 

 

 

  1. 그러나 본래의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정의(定義)가 아니라 차라리 부조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감정들의 한 열거이다. 열거가 끝났다 할지라도, 그로써 부조리가 다 고갈된 것은 아니다.(까뮈의 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