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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는 지금 슬럼프라면 좋겠네

by 답설재 2026. 7. 2.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는데 좀 우울한 듯했다.
날씨 탓일까?
문득 더없이 아름다운 금계국, 개망초 같은 것들이 눈에 띄어 날씨 때문인 건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대체로 괜찮다.
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와 너무 분주하고 늘 고단하고 용돈 씀씀이가 좋은 대신 찾는 이가 줄을 서던 그런 날들에 나는 지금보다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허약한 형편에 일은 다른 소보다 많이 해야 하는 억울한 소처럼 허덕였다.
나는 이제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으면서도 대체로 괜찮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정신을 차려 제정신인 것이고, 안 되는 것들은 아예 포기한 것이고, 남겨둔 것들은 다 그만하자고 단념한 결과다.

그런데도 가끔은 이렇게 우울해지다니…. 그럴 수는 있겠지. 늘 빙긋빙긋 웃고만 지낸다면, 그러지 않던 인간이 돌연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며 지낸다면, 마침내 바보가 된 것이겠지.

나는 이렇게 지내면서도 더러 우울해지기도 할 바에야 내가 슬럼프를 겪고 있는 것이라면 좋겠다는 엄청난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슬럼프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다. 아예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일의 진도가 제대로 나가지 않으면 그건 덜 부지런했거나 전문가에게 물어보지 않았거나 관련되는 자료나 책 읽기를 게을리했거나 뭔가가 부족하고 미흡했기 때문이지 슬럼프 같은 건 아니었다.
슬럼프라니! 운동선수도 아니고 사업가도 아닌 주제에….

그래, 그렇다 쳐도 며칠 후, 몇 달 후, 혹은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이 흐른 후, 내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 '이렇게 되려고 그랬구나!' 싶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뚜렷이 할 일도 없는 노인이지만 그래도 단 한 번 슬럼프가 왔고, 또 그걸 극복하는 계기가 오고, 해서 "봐! 내가 슬럼프를 벗어났어!" 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건 신나는 일 아니겠는가.
아는 사람은 그러겠지. "그 참 희한하네. 하는 일도 없는 노인이 슬럼프를 다 벗어나다니. 그런 일이 다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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