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상혁 / 나무 태우기

by 답설재 2026. 5. 28.

화목 난로로 난방하는 사람은 겨우내 태울 장작을 마당에 높이 쌓아두고 나면 안 먹어도 배부른 기분이 되고 유례없는 한파에도 우리 집만은 거뜬하리라며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우리 아버지는 경우가 더 심했다 장작이든 유리병 속 동전이든 여행지에서 사 온 소용없는 우표든 무언가 쌓여 있다면 생활을 위협하는 여타 요소에 관해선 어느 정도 신경을 꺼버렸다 내 기억 속 아버지는 다 늘어난 메리야스를 입은 채 대문 밖에 서서 언제나 뿌듯한 얼굴이다 동전 유리병이 다섯 개째 놓이고 우표 책이 열여덟 권으로 불었으므로 대머리 거지꼴을 하고도 근심이 적었다

어느덧 훌쭉하게 늙은 아버지가 우리 부부의 단독주택 신혼집에 처음 찾아왔고 뒷마당에 쌓여 있는 장작을 보고 촉촉이 젖은 눈이 된다 집 안은 둘러보지도 않고 제대로 사는 거 봤으니 됐다며 어머니를 차에 태우려는 것을 겨우 만류해 점심을 함께 들며 생각했다 이 세상은 아버지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단 하나도 줄 수가 없다 동시에 아버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세상 속에서 스스로 찾아낸다

이듬해 유언에 따라 아버지를 화장했다 그는 주변과 불화 없이 세상을 등졌다 돌아보니 아버지는 어머니나 나와도 크게 얽히지 않았었다

 

 

 

...............................................

김상혁  1979년 서울 출생. 2009년 『세계의문학』 등단.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김춘수시문학상〉 〈구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무나씨, 「고요한 불안」2025 Ink and acrylic on Hanji, 116.8×86㎝(출처 : 현대문학 2026.5월호, 스마트폰 촬영).

 

 

 

이 노래 같은 시를 『현대문학』 2026년 5월호에서 읽고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많이 달랐지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들은 자신의 자식을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보자 생각하고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그 방법이 옳고 그름은 하등의 문제가 아니다. 자식이 어떻게 받아들였느냐만 문제다. 거기에서 시인도 나오고 또 다른 사람도 나오고 호래자식도 나오는데 호래자식에게는 그 부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 / 花蛇  (4) 2026.05.22
장석남 / 뜰  (6) 2026.05.07
이신율리 / 각시투구  (4) 2026.05.05
정지용(동시) / 무서운 시계  (8) 2026.04.17
1000명이면 1000명, 다 다른 감상의 눈  (2) 202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