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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나의 아카시아꽃

by 답설재 2026. 5. 25.

 

 

 

아카시아꽃을 보면 꿀이 생각나거나 그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였다거나 그 꽃을 배불리 따먹은 기억이 떠오르면 오죽 좋을까.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는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金仁鎬)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느닷없이 여남은 명을 불러 세우더니 자신이 맞을 매를 만들어오라고 한 일이었다.

그는 그런 짓을 하는 걸 교육적이라고 오해했거나 했을 리 만무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교육을 포기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았다. 그런 짓을 말릴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세월이었을 뿐이다. 아예 공부를 가르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수학 문제는 그때도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잘 풀었다.

그때 우리는 '단벌'이었다. 집에 가봐야 갈아입을 옷이 없었다. 그럼 우산은 있었나? 아직 우산이 보급되기 이전이었다. 그냥 나가서 학교 옆 개천가의 아카시아 나무를 맨손으로 부러뜨려 매를 만들었다.

우리는 아무도 울지 않았다. 주머니칼을 갖고 있는 아이가 단 한 명이었는데, 그 아이는 유세는 하지 않았지만 그 칼을 쓸 수 있는 차례는 분명히 했다. 어떤 근거로 그 차례를 정하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순서를 정하는 건 아니고 한 명이 다 쓰면 남은 아이들을 둘러보고 그다음 순서를 정해주었다. 다만 그 순서대로 칼을 써서 매를 만들다가는 수업을 다 마칠 때까지 매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유 같은 걸 물으며 살아가지 않았다. 담임에게 왜 내가 매를 맞아야 하는지 묻는 건 쓸데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담임으로부터만 우등상을 받지 못했고, 역시 상을 받지 못하게 된 이유 같은 건 묻지 않았는데, 나중에 내가 교사가 되었을 때 그때 그 담임을 술집으로 불러 대접한 뒤 좀 따져보려고 했더니 겨우 한두 잔에 취한 척, 친한 척해서 이도저도 다 무산되고 말았다.

 

내가 초등교사 발령을 받았을 때까지도 아이들을 두들겨 패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른바 '문화'가 그러니 그런가 보다 했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어서 매우 언짢은 나날이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그걸 눈치채었을까, 그분은 내 눈치를 많이 봤다. 그래서 하는 얘긴 아니지만 첫 발령에 만난 그분은 내가 근 20년간 모신 교장 중 최고였다. 성함은 김위복(金位福).

 

나는 이렇게 해서는 교육다운 교육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교육청에 가서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고, 이후로는 아예 매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사랑의 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한때 '대체벌'이라는 말이 이슈가 되기도 했는데 그건 개그에 지나지 않는다.

데즈먼드 모리스 같은 이는 막대로 엉덩이를 때리는 행위는 그렇게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교를 연상케 한다고 썼다. 아직도 매를 그리워하는 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더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결코 정당하지 않은 개인 간의 일방적인 전쟁일 수도 있다. 폭력일 뿐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추억은, 아버지로부터 추방당한 날의 추풍령 철로변의 아카시아숲이다.

그날도 봄비가 내렸다.

내가 탄 서울행 완행열차가 그 고갯길을 힘겹게 그리고 기 죽지 않고 오를 때 철로변의 아카시아꽃 무리는 그 비바람에 성난 파도처럼 춤을 추었고, 그 미친 춤을 바라보며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 시각, 보마마나 내 어머니도 그 슬픈 집에서 울고 있었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니 나는 인생이란 걸 스스로 쓰라리게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나의 아카시아꽃이다.

슬픔을 좀 달래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본당 첨탑이 보이는 산비탈에서 가위바위보로 아카시아잎 따기 내기를 하자고 한 사람이 있었지만 나는 그게 영 재미가 없었다.

내가 재미없어해서였겠지. 나를 가망 없는 사람으로 봤을 그 사람은 아카시아꽃도 없을 것 같은 먼 곳으로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