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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조르조 아감벤 《횔덜린의 광기》

by 답설재 2025. 12. 9.

 

 

 

조르조 아감벤 《횔덜린의 광기》

박문정 옮김, 현대문학 2025

 

 

 

횔덜린에게 거주하는 삶은 "인간은 이 지상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시적'인 삶이다. 독일어 동사 'dichten(시를 짓다)'은 어원적으로 라틴어 'dictare(받아쓰게 하다, 구술하다)'에서 유래했는데, 고전 작가들이 종종 필경사에게 자신의 작품을 구술하기 시작하며 점차 '시를 짓다' '문학작품을 창작하다'라는 의미로 자리 잡았다. 시적인 삶, 즉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이란 하나의 '구술된 삶', 곧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지는 삶이다. 이는 하나의 습관, 하나의 주어짐에 따른 삶으로 우리는 그것을 소유할 수 없고, 다만 거주할 수 있을 뿐이다.

(......)

그(프리드리히 횔덜린)의 광기(狂氣)는 사회 전체가 깨닫지 못한 채 빠져든 광기에 비한다면 완전히 무해한 것처럼 느껴진다. 네카 강변의 탑에서 시인이 살았던 그 '거주하는 삶'에서 내가 포착해보고자 했던 정치적 교훈을 더듬어본다면, 나는 아마 당분간은 그저 "더듬거리고 더듬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는 독자는 없다. 수신자를 잃은 언어만 있을 뿐이다. '시적으로 거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은 아직 답을 기다리고 있다.

팔락쉬, 팔락쉬*.

('에필로그'의 끝부분)

 

 

아감벤이 분석한 횔덜린의 '거주하는 삶'이란, 외부 세계를 정복하거나 의지를 관철하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내면의 흐름과 성향에 몸을 맡기고, 그 안에서 스스로에게 영향을 받으며 기쁨과 광기까지 끌어안는 '중간태'적 실존 방식을 의미한다.

(......)

아감벤은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이 성공이 아니라 '실패'이며,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횔덜린의 삶이 바로 증거이다. 그의 명백한 패배는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시대의 기만을 폭로하며 역설적인 정당성을 획득한다.

(......)

'더는 독자는 없다. 수신자를 잃은 언어만 있을 뿐이다"라는 그의 마지막 독백은 이 시대의 지식인이자 사상가로서 느끼는 깊은 고독과 절망을 드러낸다. 공과 사의 구분이 무너지고, 진정한 소통의 가능성이 사라진 시대, 아감벤이 횔덜린의 '거주하는 삶'에서 더듬거리며 찾고자 했던 '정치적 교훈'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글'에서)

 

 

 

.........................

* 수수께끼 같은 외침, 아감벤의 글은 명쾌한 해답이 아닌 깊은 울림과 함께 우리를 각자의 사유 속으로 떠민다는 것이다.

**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동시대의 주권 권력과 생명정치를 분석해 온 이탈리아 철학자다. 그의 생명정치 비판은 코로나 팬데믹 국면에서 국가가 생존을 명분으로 개인의 삶을 통제하는 예외 상태가 일상화되면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아감벤에게 팬데믹은 인간의 삶을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로 환원해 관리하는 '인류학적 기계'의 작동이 가장 폭력적으로 드러난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는 팬데믹 시기 동안의 개입을 『우리는 어디쯤인가』로 풀어내며 당대의 인문학적 담론을 촉발했으나, 이 시기를 통과하며 그가 제시한 최종적인 사유의 행보는 정치철학적 논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옮긴이의 글' 시작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