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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형제간의 싸움 : 일본 왕실 외척의 경우

by 답설재 2025. 12. 17.

형제가 각자 자신의 딸을 왕에게 시집보내 놓고 다투면 그 딸들도 서로를 질시하겠지. 또 그 딸들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도 상대방을 질시하기 마련이겠지.

역사는 그렇다.

사실은 지금 세상도 그렇다.

나는 이런 세상이 싫다. 그런 나를 소극적인, 나약한 사람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넌더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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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이었던가,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의 에세이집 《베겟머리 서책 枕草子》을 읽은 소감문에 불친 淸(나데시코)님께서 요긴한 댓글을 달아주셨다.

마침 일본 TV에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는데 두 여방(女方)* 세이 쇼나곤과 무라사키 시키부가 등장해서 서로 질시하는 장면이 흥미롭다는 내용이었다.

 

무라사키 시키부? 그녀는 또 어떤 여방인가 싶었는데 淸님께서 그녀도 여방으로 있을 때《무라사키 시키부 일기》를 썼다고 해서 나는 당장 그 책도 구입해서 읽었다.

세이 쇼나곤의 《베겟머리 서책》이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에세이집이라면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紫式部日記》는 쇼시 중궁을 시중든 내용이 중심인 일기였는데, 군데군데 세이 쇼나곤을 비방한 내용이 보여서 흥미롭긴 해도 권력을 둘러싼 다툼과 비방은 매우 언짢았다.

 

두 책에서 그 내용을 다 찾아 낱낱이 대조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지긋지긋한 느낌이 너무 짙어서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의 해제에서 그 참담함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 중 두 부분만 옮겨 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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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궁 쇼시(彰子, 988~1074)는 999년 12세 나이로 이치조(一條) 천황(제66대, 재위 986~1011)에게 출사했으나, 9년 동안 한 번도 회임한 적이 없었다. 출사할 당시 이치조 천황에게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큰형이자 정적인 후지와라노 미치타카(藤原道隆)의 딸 데이시(定子)가 이미 중궁으로 있었고, 20세의 이치조 천황에게 12세의 쇼시는 그다지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던 듯하다. 쇼시의 아버지 미치나가는 여러 종류의 서적과 공예품을 쇼시 중궁전에 들여놓고 학문과 교양을 추구하는 이치조 천황의 관심을 끌어 보려고 애썼으나 큰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쇼시 출사 2년 후인 1001년에 데이시가 제2황녀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쇼시는 여전히 이치조 천황의 총애를 받지 못했다. 데이시를 잃고 상심에 빠진 이치조 천황이 쇼시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치나가는 데이시가 남긴 장남 아쓰야스(敦康) 친왕을 쇼시에게 키우게 하면서 천황과 쇼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하지만, 여전히 쇼시에게는 회임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당대 권력가의 딸로서 천황과 정략결혼을 하게 된 쇼시, 한 집안의 흥망성쇠가 쇼시 한 몸에 달려 있으므로 가문을 위해서는 천황의 후손, 그것도 아들을 낳아야만 했다.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해제 5~6에서 옮김. 이 일기는 쇼시 중궁이 회임하여 출산을 앞둔 1008년 7월 19일부터 시작되고 있음.

 

 

 

 

 

쇼시 중궁의 아버지 미치나가는 헤이안 귀족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그가 읊은 와카 '이 세상은 다 내 세상이 되었네. 저 보름달이 흐려져 기우는 일이 절대 없는 것처럼'(쇼유키 小右記)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미치나가는 아버지인 후자와라노 가네이에(藤原兼家, 929~990)의 막내아들로, 맏형인 미치타카(道隆, 953~995, 데이시 중궁의 아버지)와는 열세 살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형들이 먼저 출세해 이치조 천황이 즉위한 986년에는 권대납언(權大納言)이나 권중납언(權中納言)으로 있었으며, 특히 맏형 미치타카는 이치조 천황이 11세로 성인식을 했을 때 첫 번째로 딸 데이시를 입궁시켰다. 미치나가는 당연히 뒤로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러한 형들의 출세를 미치나가는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야심을 갖고 미래의 도약을 위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중 하나가 딸 쇼시의 존재였다. 형들이 중류계급인 지방관의 딸과 결혼한 것에 비해, 미치나가는 황실 혈통인 미나모토노 린시(源倫子, 964~1053)를 정처로 맞아들였다. 앞으로 가질 딸을 미치타카의 딸 데이시보다 높은 위치에 올리기 위해서는, 고귀한 집안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택하는 것이 보다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린시는 결혼 다음 해인 988년에 바로 쇼시를 출산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995년에 미치나가의 운명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 맏형인 미치타카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외의 공경들이 전염병으로 공경 상위의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죽은 것이다. 살아남은 미치타카의 장남이자 데이시 중궁의 오빠인 고레치카와 권대납언이었던 미치나가뿐이었다.

최고 권력자 자리를 놓고 결국 두 사람의 대결 구도가 되었는데, 이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이치조 천황의 어머니인 센시였다. 센시는 친누나로서 미치나가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물론 고레치카도 센시의 조카에 해당했으나, 자신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이치조 천황과 관계를 맺으려 하는 고레치카가 센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시 고레치카는 22세, 미치나가는 30세라는 나이도 유리하게 작용해 이치조 천황은 결국 미치나가를 귀족의 대표로 선택하게 된다.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에는 미치나가의 최고 권력자로서의 면모가 잘 그려져 있다.

사실, 미치나가가 위의 '이 세상은 다' 와카를 읊으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게 되는 것은 이 일기가 그리는 쇼시 중궁 출산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018년의 일이다. 쇼시가 황자를 낳아 그 아이가 천황의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미치나가의 영화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해제 16~18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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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방(女方) : 궁궐이나 귀인의 집에 기거하면서 귀인을 시중들던 여자 관리. 단순한 시녀가 아니라 귀인의 가정교사까지 담당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문예활동을 통해 귀인의 가문을 빛내기도 했다.(각주에서 옮김)

※ 모든 용어는 원전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