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클레어 키건 소설 《너무 늦은 시간》
So Late in the Day
허진 옮김, 다산북스 2025
정신 차리지 않으면 다가온 여자조차 놓치고 이 모양 이 꼴 나서 서글픈 신세가 된다!
그걸 보여주는 소설이구나 싶었다.
계획대로 이루어졌다면 결혼식 날이었을 어느 하루의,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카헐의 이야기다.
더블린의 '평범한' 직장인 카헐은 '평범한' 청년이었지만 프랑스 출신 약혼녀 사빈으로부터 버려진다.
서글프다.
읽고나서 몇 군데를 다시 살펴봤다.
평범한 남자였다고?
아니다. 어떤 일에든 핑계를 찾고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거나 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여성에 대해 고약한 인간이다.
결혼을 앞둔 사이인데도 단 한 번도 돈을 더 쓰려고 한 적이 없고, 자신이 지불한 돈은 잊지 않고 생색을 낸다.
사사건건 그렇다.
사빈이 좋아하는 화가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여성들에 대해서도 하나같이 한가롭고 게으르기만 하다고 생각한다.
평범하다고 본 건 그의 이야기를 읽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약한 인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세대의 남성들은 '숨어서'(발각되지 않고) 살기에 좋은 세월을 보낸 것일까?
평범한 하루였다. 잭 화이트 여관 정류장에서 탄 임신부가 통로를 걸어오더니 그의 반대편 빈자리에 앉았다. 카헐은 좌석에 앉은 채 그녀의 향기를 들이마시다가 문득 수십만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천 명의 여자에게서 같은 향기가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
내가 이런 문장을 보고 평범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나?
다 읽고 다시 찾아봤더니 녀석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정말 모르겠어." 그가 말했다. "신시아가 뭐래?"
"요즘 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당신 또래의 남자 절반은 그냥 우리가 입 닥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길 바란대. 남자들은 제멋대로 살아서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한심하게 군대."
"그런가?" (37)
"또 어떤 남자들한테 우리는 씹년일 뿐이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아일랜드 남자들이 여자를 그렇게 부르는 걸, 창녀니 암캐니 하는 걸 종종 듣는대. 와인 한 병을 다 비웠고 식사는 아직 안 했었지만 확실히 기억해. 이게 신시아가 해준 말이야."
"아,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방식이 그래." 카헐이 말했다. "그냥 아일랜드의 관습이야. 보통 아무 의미도 없어."
"모니카, 그러니까 폴란드 출신 청소부가 신시아한테 그랬대. 그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서 크리스마스 때 카드 한 장 안 준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정말이야?" (38)
결정적 문장이 있다.
"당신, 여성혐오의 핵심이 뭔지 알아? 결국 따지고 보면 말이야."
"그래서, 이제 내가 여성혐오자라는 거야?"
"안 주는 거야." 그녀가 말했다. "우리한테 투표권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설거지를 돕지 말아야 한다고 믿든, 결국 파보면 다 같은 뿌리야."
"캐보면." 카헐이 말했다.
"뭐?"
"'파보면'이 아니라 '캐보면'이라고." 그가 말했다.
"봤지?" 그녀가 말했다. "이것도 결국 똑같잖아? 당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아들었잖아. 하지만 요만큼도 봐주질 못하는 거야."
끝장일 수밖에...
카헐은 사빈으로부터 여성혐오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파혼의 길을 갔다.
예정대로였으면 결혼식이 열렸을 그날 저녁, 그는 서글퍼하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책 보기의 즐거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무라이 슌스케의 정원 (6) | 2025.10.14 |
|---|---|
| 원옥진(동화) 《강 너머 산마을 프로젝트》 (6) | 2025.10.08 |
| 10인의 동시집 《눈사람나라 뉴스》 (2) (6) | 2025.09.29 |
| 10인의 동시집 《눈사람나라 뉴스》 (1) (6) | 2025.09.28 |
| 고선경 산문 《내 꿈에 가끔만 놀러와》 (15) | 2025.09.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