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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윤동주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by 답설재 2024. 9. 24.

윤동주(동시집)《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조경주 그림/만화, 신형건 엮음, 푸른책들 2016

 

 

 

 

 

 

 

소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씻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눈 오는 지도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 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 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훌훌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 하냥 :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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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시를 애송시로 정한 이는 많을 것 같다.

그런 시는 이미 내 시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어서 두어 번 본 듯한 이 시를 옮겨 썼다. 세상 어디에 소년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사람이 그렇게 살았어도 가슴 아프다면 그를 위해 이 시를 써두어야지, 생각했을까.

여기 그 소년은 이렇게도 살았다면서 '눈 오는 지도'도 써두었을까.

눈이 내리면 살펴볼 수 있겠지.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