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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세이 쇼나곤 / 새벽에 헤어지는 법

by 답설재 2024. 3. 19.

 

 

 

새벽녘 여자네 집에서 돌아가는 남자는, 너무 복장을 단정히 하거나 에보시 끈을 꽉 묶지 않는 것이 좋다.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졌다고 해서 누가 흉을 보겠는가?

밤을 같이 보내고 새벽이 가까워 오면 남자는 자리에 누운 채 일어나기 싫다는 듯이 우물쭈물하고 있어야 한다. 여자가 "날이 다 밝았어요.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하는 재촉을 듣고서야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앉는다. 일어나 앉아서도 바로 사시누키를 입으면 안 되고 한동안 우두커니 앉아 생각에 잠긴 듯이 있다가 귓속말로 밤에 있던 일을 속삭이며 슬그머니 속곳 끈을 묶고 일어서야 한다. 격자문을 밀어 올리고 쪽문까지 여자와 함께 가면서 낮 동안에 못 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다시 한 번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런 식으로 해서 남자가 밖으로 나가게 되면 여자는 자연히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별을 슬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지가 않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갑자기 생각난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잽싸게 사시누키를 입고, 그 위에 노시나 포, 가리기누를 걸치고 옷매무새를 매만진 후 허리띠를 졸라맨다. 그러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에보시를 머리에 쓰고 끈을 꽉 묶어 반듯하게 고쳐 쓴 다음, 전날 밤 베개맡에 놓아둔 부채와 회지(懷紙)를 찾아 엎드린 채로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더듬거리기 시작한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면 "도대체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는 게야" 하면서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탁탁 내리치다가 손에 부채와 회지가 만져지면  휴우 간신히 찾았네 하고 안도의 숨을 크게 내쉬고는 그 부채를 쫙 펴서 마구 부쳐 대며 회지를 품에 집어넣고 '에헴, 그럼 이만 실례하겠소이다"라며 돌아가는 것이 보통 남자들의 태도다.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는 남자가 저녁에 여자네 집을 방문해 밤을 함께 보낸 후 새벽에 돌아가는 통혼(通婚)의 형태였다니 남자 쪽으로서는 여러모로 유리했겠지만 여자 쪽으로서는 그 관계가 맺어질는지 어떨지 늘 불안했을 것이다. 또 오겠다는 약속을 했으면서도 관계가 끊어지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면 여성들은 알 수 없는 것이 사나이 마음이라고 노래했겠지?

그러니까 세이 쇼나곤이 저렇게 품위 없이 떠난 남정네를 향해 빈정대고 흉을 본 것은 고소하다는 느낌을 준다. 

물론 당신을 좋아해요, 해놓고는 다른 남자 품에 안겨 있는 경우도 없진 않았겠지만 하룻밤 인연이었어도 일단 멋있게 헤어지면 서로 간에 좋은 추억이라도 되었을 일 아닌가.

남자가 유리하다고, 주제에 남자라고, 저 옹졸한 녀석이 서둘러 떠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고 그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더, 더, 밉쌀스럽다.

남녀 간의 만남만으로 보면 그 멋과 낭만의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