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애인의 '실수', 여성스러운 변덕이나 약점에만 연연해하지 않는다. 어떠한 아름다움보다 그의 마음을 더욱더 오래, 더욱더 사정없이 붙잡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그리고 기울어진 걸음걸이다. 우리는 이를 이미 오래전에 경험했다. 어째서인가? 감정은 머리에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학설이 맞는다면, 또한 창문, 구름, 나무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머릿속이 아니라 그것들을 본 장소에 깃들어 있다는 학설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애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 자신을 벗어난 곳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긴장과 환희를 느낀다. 감정은 여인의 광채에 눈이 부셔서 새떼처럼 푸드득거린다. 그리고 잎으로 가려진 나무의 우묵한 곳에 은신처를 찾는 새처럼 감정은 사랑하는 육체의 그늘진 주름살, 투박한 몸짓,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결점을 찾아 그 안에 숨어 들어가 안전하게 은신처 안에서 몸을 움츠린다. 사모하는 사람에게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랑의 떨림은 바로 거기, 결점이 되고 비난거리가 될 만한 것 안에 둥우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벤야민의 이 글의 제목은 '애인'이 아니라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이다.
그 글의 앞 부분은 다음과 같은 두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림 : 여기 심어놓은 식물들 보호 요망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 벌채구역처럼 우리 뒤에 남겨진 게 아닌가? 우리는 그것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잎을 쳐내 시야를 트이게 할 생가조차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가면서 그 벌채구역을 뒤에 남겨놓는다. 그래서 그곳은 멀리서도 보이긴 하지만 불분명하고 흐릿하게, 그만큼 더 불가사의하게 얽히고설킨 모습이다.
해설과 번역이 텍스트에 대해 갖는 관계는 양식과 미메시스가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와 같다. 이들은 다른 시각에서 본 똑같은 현상들일 따름이다. 해설과 번역은, 성스러운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영원히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들이고, 세속적 텍스트라는 나무에서는 제때 익어 떨어지는 열매들이다.
그러므로 나는 벤야민의 이 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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