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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by 답설재 2024. 3. 24.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김영옥·윤미애·최성만 옮김, 길 2015

 

 

 

 

 

 

 

본문 앞에 긴 해설이 있다(~64).

다른 책을 읽을 때처럼 '해설은 됐고'로 넘겨버리고 69쪽에서 시작되는 『일방통행로』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주유소

 

삶을 구성하는 힘은 현재에는 확신보다는 사실(事實)에 훨씬 가까이 있다.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확신을 뒷받침한 적이 없었던 '사실' 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진정한 문학적 활동을 위해 문학의 테두리 안에만 머물라는 요구를 할 수 없다. 그러한 요구야말로 문학적 활동이 생산적이지 못함을 보여주는 흔한 표현이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 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견해란 사회생활이라는 거대한 기구에서 윤활유와 같다. 우리가 할 일은 엔진에 다가가서 그 위에 윤활유를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숨겨져 있는, 그러나 반드시 그 자리를 알아내야 할 대갈못과 이음새에 기름을 약간 뿌리는 것이다.

 

 

이게 뭐지? 무슨 의미지? 주유소? 주유소란 어떤 곳을 말하는 것일까? ......

이렇게, 이런 상태로 읽어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더 읽어나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책을 좀 읽었지만 해설 같은 것에서 그 작품으로부터의 감동에 영향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작품 해설' 같은 건 되도록 읽지 않았다. 특히 작품을 읽기 전에는 읽지 않았다.

거의 처음으로 이 책의 '긴 해설'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꼴은 정말이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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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 기록

 

화보(사진)

■ 발터 벤야민 선집을 기획하며

■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

■ 해제: 『일방통행로』에서 『파사주』까지

■ 옮긴이의 말

 

 

(해설에서 발췌)

 

그는 1920년대 인플레이션 등으로 몰락해 가는 독일 시민사회에서 받은 파노라마적 인상이나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철학적·정치적·문학비평적 관찰과 성찰들, 꿈, 여행기, 기억 등을 몽타주로 엮은 철학적 아포리즘 모음집 『일방통행로』를 출판하기도 한다. 『일방통행로』의 형식은 당시 파리에서 접한 초현실주의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바가 크다. (...) 한편 벤야민의 에세이와 산문 단편, 『사유이미지』들은 기지에 찬 사상적 통찰들만이 아니라 그 문체와 아방가르드적 형식에서 독특함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측면은 최근에 와서야 벤야민 수용사에서 주목받아 연구되기 시작했다.

- 최성만 「발터 벤야민의 생애와 사상」(36~37)

 

『일방통행로』는 현실과 초현실세계의 다양한 경험들에 대한 아포리즘적이면서 이미지적인 성찰을 담고 있다.

- 최성만 「 『일방통행로』에서 『파사주』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혁명적 지식인 ─」(43)

 

모두 60편으로 이루어진 이 『일방통행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현대 도시의 길거리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길거리를 따라 가로에 늘어선 다양한 가게의 간판, 벽보, 플래카드, 광고판, 쇼윈도, 번지수가 적힌 집들, 기타 공간들처럼 단편의 제목들이 책의 양편에 늘어서 있는 것이다. 이 거리를 산보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공간들의 열림과 닫힘, 멀어짐과 가까워짐의 모습들을 벤야민은 광상학적 내지 현상학적 시선으로 '사유이미지'로 읽어낸다.(48)

 

이러한 이미지들을 배치하는 방식의 원리는 한마디로 '몽타주'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몽타주적 구성은 그의 텍스트를 1920년대 독일 아방가르드 문학의 전범으로 만든다. 그러나 벤야민이 생전에 출판한 책 가운데 유일하게 비문학적인 이 책은 당시의 수용에서나 이후의 벤야민 연구에서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낡은 형식 전통을 파기한 대담함보다는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이었다."(48~49)

 

여기서 벤야민이 이해하는 '정치'는 직접적 형태의 정치적 현실참여가 아니라 매개된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진정한 정치가'로서 혁명적 글쓰기의 주체가 갖는 자아의식 속에서는 지식인으로서의 성찰들이 '어린아이'. 거리 산보자, 꿈꾸는 자, 연인, 수집가, 여행하는 자로서 하는 경험이나 관찰들과 함께 종합되고 몽타주 되어 제시되고 있다. 여기서 종합의 방식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적이다. 즉 각각의 단편은 평범하며 하찮으며 낡고 우연한 것 또는 숨겨진 것에서 새로운 것, 놀라운 것을 감지해 내는 '범속한 각성'과 같은 인식의 계기를 내포한다.(50)

 

"벤야민의 사유이미지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비유적으로 불러내다는 의미에서 끼적거려 놓은 수수께끼 그림들이다. 그 이미지들은 개념적 사유를 정지시킨다기보다 그 수수께끼 같은 형상으로 충격을 주고 그로써 사유를 움직이고자 한다. 그것은 사유가 전통적인 개념적 형태로 굳어진 채로 있고 인습적이고 노화되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양식으로 증명될 수 없으면서도 강제적 힘을 발휘하는 것이 사고의 자발성과 에너지를 자극하고, 또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짐이 없이 일종의 지적인 단락(短絡)을 통해 불꽃을 점화시킬 것이다. 이 불꽃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 불현듯 다른 각도에서 비춘다."(아도르노) (52)

 

"성찰은 작용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멀리 떨어뜨려놓고, 사물들은 섬광이 비치는 순간 보이는 모습 그대로 내버려 둔다. 그것은 철학자 벤야민이 이성을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금욕을 통해서 비로소 사유를, 세계가 사람들에게서 추방시키려고 하는 그 사유 자체를, 다시 복구할 수 있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것이 마치 자명한 것인 양 제시되는데, 그것은 자명한 것의 권위를 박탈하기 위해서이다."(아도르노) (53)

 

"닫힌 학문체계가 부르주아의 추상적이고 닫힌 계산적 사유와 똑같은 과정으로 사멸해 가는 것이다. 니체가 체계를 심지어 '부적직성에의 의지'라고 매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말이다."(블로흐) (54~55)

 

벤야민은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에서 전개한 유물론적 성찰들의 대상과 형식, 그리고 현상학적·관상학적 시각, 문화적 몽타주의 방법, 진부하고 작은 것에서 큰 맥락을 읽어내는 '미시적 시각'은 모더니티의 '원사'에 대한 그의 미완의 주저 『파사주』에 이르기까지 관통하게 된다.(56)

 

'도취'는 벤야민이 강조하듯이 낭만주의적이고 목가적인 경험이 아니다. 바로 이 도취적 경험의 복구가 초현실주의자들이 추구한 바였다. 왜냐하면 현실은 이미 점증하는 소외와 물화, 이러한 소외와 물화를 추동하는 자본주의적 합리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는 여러 휴머니즘과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교육을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그러한 도취를 통해 우주 및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것을 차단하거나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5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