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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길가메시 프로젝트 : 불멸의 신인류

by 답설재 2024. 3. 31.

우루크왕 길가메시 : DAUM 이미지(부분 : 2024.3.30)

 

 

 

이 블로그 유입 키워드 목록에서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발견했다.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 생각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에 그 왕의 이야기를 읽었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건 어차피 이루어지지도 않을 일에 대한 인간의 무모한 욕심을 나타낸 것이어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그 기억이 흐릿했으나 《사피엔스》(유발 하라리)에서 길가메시 이야기를 다시 읽은 것이 최근이어서 기억에 생생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거라면 내가 알고 있지'라는 생각은 주제넘은 것이고 조리있게 설명하기가 그리 쉬운 것도 아니어서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유발 하라리는 "해결이 불가능해 보이는 인류의 모든 문제 중에서도 가장 성가시고 흥미롭고 중요한 것은 늘 죽음의 문제였다."고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길가메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오래된 고대 신화, 즉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신화가 다루는 주제도 이것이다. 그 주인공인 우루크의 왕 길가메시는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유능한 남자로, 전투에 나서면 누구에든 승리를 거두었다.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 엔키두가 죽었다. 길가메시는 친구의 시신 옆에 앉아서 오래오래 관찰했고 마침내 친구의 콧구멍에서 벌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길가메시는 끔찍한 공포에 사로잡혔고, 자신은 결코 죽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죽음을 물리칠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어야 했다.

그는 우주의 끝을 향해 여행을 떠났다. 사자를 죽이고 전갈사람과 싸우며 저승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죽음의 강 뱃사공인 우르샤나비의 배를 움직이는 신비한 '돌로 된 것들'을 부숴버린 뒤, 최초의 홍수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생존자 우트나피시팀을 발견했다. 하지만 길가메시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로서 빈손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새로운 지혜의 한 토막이 그와 함께했다. 그는 깨달았다. 신들은 인간을 창조할 때 죽음을 필연적 숙명으로 정했으며 인간은 그 숙명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길가메시가 그렇게 '포기해 버린 프로젝트'를(길가메시의 그 포기를 일단 '패배주의적 태도'라고 해두자) 오늘날 과학자들은 지금 한창 연구 중이고, 그 연구가 머지않아 성공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유발 하라리의 설명이었다.

나는 그의 글에 압도되었다고 이미 이 블로그에 써놓았는데 이 포스팅을 하면서 그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있다.

 

 

진보의 사도들은 이런 패배주의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자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에 불과하다. 사람이 죽는 것은 신이 그렇게 정해놓았기 때문이 아니라 심근경색이나 암, 감염 같은 다양한 기술적 실패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기술적 문제에는 기술적 해답이 있기 마련이다.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지 않으면 심박조절기로 자극을 주거나 새 심장으로 교체하면 된다. 암이 날뛰면 약이나 방사선으로 죽이면 된다. 박테리아가 증식하면 항생제로 제압할 수 있다.

 

 

나는 핏줄이 막혀서 2009년 연말에 이미 죽었을 사람인데 이렇게 살아 있기 때문에 유발 하라리의 이 설명을 당장 알아들었다. '음... 이제 곧 핏줄이 막히면 밤중에라도 아파트 앞 24시에 가서 꼴깍 삼키면 되는 캡슐 한 알을 구입해서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하겠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것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두었다. 캡슐이 아니라 나노 로봇이다. 다음과 같다.

 

 

나노공학자들은 수백만 개의 나노 로봇으로 구성된 생체공학적 면역계를 개발 중이다. 그 로봇들은 우리 몸속에 살면서 막힌 혈관을 뚫고, 바이러스와 세균과 싸우고, 암세포를 제거하며, 심지어 노화과정을 되돌릴 것이다. 몇몇 진지한 학자들은 2050년이 되면 일부 인류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불멸은 아니다. 사고를 당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치명적인 외상을 당하지 않는 한 생명이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

길가메시 프로젝트가 성공하든 그렇지 않든,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근대 후기의 종교와 이데올로기 대부분이 죽음과 사후세계를 방정식 바깥으로 이미 제쳐놓았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종교는 죽음과 사후의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다. 18세기가 되면서 종교와 자유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등의 이데올로기들은 사후세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고?

그건 또 어떻게 하나?

과학자들은 그것도 연구할까? 연구하고 있을까? 모르지. 나는 굳이 그걸 알고 싶지도 않다. 2050년 이후의 일이라니까...

혹 길가메시가 오늘날 과학자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현명했던 건 아닐까? 글쎄, 나로서는 그것도 알 필요가 없겠지?

 

 

☞ 《사피엔스》(조현욱 옮김, 김영사 2016)에서 직접 확인하려면 378~384쪽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