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BIFF)에 초청된 일본 하야카와 감독 인터뷰 기사를 봤다(「"경제 좀먹는 노인" 총살..."이젠 현실 같다"는 섬뜩한 이 영화」 중앙일보 2022.10.12).
기사의 전반부는 이렇다.
"고령층이 일본 경제를 좀먹고,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부담감을 지우고 있다. 노인들은 분명 우리 사회에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한 젊은 남성이 이 같은 주장을 남긴 뒤 노인들을 총기로 살해한다. 유사한 노인 혐오 범죄가 잇따르자 정부는 75세 이상 국민에게 스스로 죽음을 택할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을 제정한다. 이른바 '플랜75' 정책으로, 국민이 죽음을 신청하면 정부가 존엄사 절차를 시행해 준다. 이 제도를 택하는 노인에게는 '위로금' 명목으로 10만 엔(약 98만 원)도 지급한다. 공무원들은 공원을 돌며 정책을 홍보하고, TV 공익 광고에선 "언제 죽을지 결정할 수 있어서 좋다"며 웃는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현실인지 상상인지 분간이 어려운 위 풍경은 다행히 영화 속 이야기다. 지난 6월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플랜75'(Plan75)는 이 같은 섬뜩한 상상을 담아내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과 한국 모두 2025년이면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는 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고령화 문제를 디스토피아적인 상상력으로 그려낸 이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영화가 장편 데뷔작인 하야카와 치에(46) 감독은 "약자에 대해 관용이 점차 사라져 가는 일본 사회에 대한 분노감 때문에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기사 후반부의 소제목은 "약자에 관용 잃어가는 사회에 분노" "국가에 순종적인 日 사회, 이대론 안 된다는 위기감"이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이미 읽은 적이 있었다. 아니, 우리나라에는 이미 그 소재의 소설이 발표되어 있었다.『현대문학』 2017년 12월호에 실린 『당신의 노후』(박형서)라는 소설이었다.
우리 사회를 살기좋고 아름다운 곳으로 가꾸기 위해 연금공단에 들어가서 연금을 축내는 늙은이들을 찾아 교묘하게 살해해 나가는 끔찍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마치 퇴임해서 연금만 축내고 들어앉아 있는 나를 누가 잡으러 오는 듯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땐 아직 사무실에 나가는 때였는데도 그런 느낌이었다. 심지어 '이 소설은 나만 읽으면 그만이지 블로그에 싣거나 다른 사람에게 이런 소설이 있다고 일부러 알릴 필요는 없다'는 어처구니없고 같잖은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알게 되면 그중에 용감하고 지능적인 어떤 사람이 정말로 그렇게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연금이나 축내는 사람을 하나씩 하나씩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 소설이 그만큼 실감나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다음은 그 소설에 나오는 대화 한 장면이다.
"자네도 알다시피, 신학대를 그만두고 팀에 들어올 당시의 나는 꽤 화가 나 있었다네. 모아둔 돈도 없는 주제에 늙어서 죽겠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 얘기인가? 젊은이가 노인들 부양하려고 사나? 세상이 너무나 꽉 막혀 있었지. 살리기 위해서는 숨통을 터주어야 했네. 하릴없이 연금이나 축내는 늙은이들을 처리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네. 하지만 끝도 없었지. 이 빌어먹을 늙은이들은 도대체 어느 소굴에서 기어 나오는 걸까? 좌표라도 뜨면 가서 불을 지르고 싶었다네. 매일매일 힘겹게 처리해도 다음 날이 되면 빳빳한 새 리스트가 전달되곤 했지.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이었어. 하지만 언젠가 끝이 있을 거라 생각했네. 결국, 몽땅 처리해버리면 될 테니까. 아주 산술적인 생각이었지만 그 바보 같은 산수가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라 믿으며 나 자신도 잊은 채 살았다네."
(…)
제풀에 격해진 젊은이가 가슴까지 들썩이며 말했다.
"왜 안 죽어? 응? 늙었는데 왜 안 죽어? 그렇게 오래 살면 거북이지 그게 사람이야? 오즘 툭하면 120살이야. 늙으면 죽는 게 당연한데 대체 왜들 안 죽는 거야? 온갖 시시콜콜한 병에 걸려 골골대면서도 살아 있으니 마냥 기분 좋아? 기분 째져? 어제도 출근하다 보니 어떤 노파가 횡단보도를 점거하고는 5분 동안 건너더라고. 영락없이 지각을 해서 이사장님한테 꾸중 들었지 뭐야. 나라 전체가 그래. 사방이 꽉 막혀서 온통 썩어가고 있어. 하는 일이라고는 영혼이 떠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게 전부인 주제에 당신들 대체 왜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거야?"
장길도는 문득 젊음의 정체가 의아해졌다. 젊은 시절 당연히 누리던 그 싱그러운 감각이 통 생각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잊어버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건 왜 잠깐 주어졌다가 사라지는 걸까?
불치병을 앓는 젊은 여성이 '경로석(?)'에 앉아 있는데, 한 노인이 다가가 다짜고짜 그 여성의 뒷덜미를 내리쳤다고, 하필이면 그 소설을 읽고 있을 때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가 전해 주었다.
아, 그런 인간이 늙도록 살아 있다니, 나는 분을 못이겨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남은 세월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언제까지 살아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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