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김 교수가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여기 오면 기분이 좋아요."
'여기'란 우리 동네이기도 하고 그 카페이기도 합니다.
그는 메뉴판 들여다보는 시간의 그 여유를 좋아합니다.
매번 30분은 들여다보지만 그래봤자 뻔합니다. 살펴보고 망설이고 해 봤자 결국 스파게티나 리소토 한 가지, 피자 한 가지를 시키게 되고 우리는 그것도 다 먹지 못합니다.
그는 다만 미리 콜라를 마시며 그렇게 망설이고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즐길 뿐입니다.
지난 1월의 어느 일요일에 만났을 때는 그럴 줄 알고 내가 콜라 한 병을 미리 주문해 주었는데 얼음을 채운 그걸 마시며 이번에도 30분 이상 메뉴판을 이쪽으로 넘기고 저쪽으로 넘기고 하더니 난데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우리 스테이크 시킬까요?"
"그 비싼 걸 뭐 하려고요. 그걸 시키면 샐러드도 별도로 주문해야 해요."
"그러면 모엣 샹동 한 병 마실까요?"
"아 참, 15만 원이라잖아요!"
"이거 참 맛 좋은데......"
"나중에, 특별한 날 마시죠."
김 교수는 아무 말 않고 순순히 피자 페이지를 들여다봅니다.
특별한 날......
사실은 올해 어느 날이 그에겐 특별한 날입니다. 만 90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특별한 날은 드물겠지만 나는 15만 원이나 하는 샴페인을 마시는 일이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둘이서 그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을 다른 사람이 보면 뭐라고 할지 그것도 생각났습니다.
특별한 날!
그렇게 얘기해 놓고 생각하니까 그게 숙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언젠가 "오늘 모엣 샹동을 한 병 마십시다!" 그래야 할 것 같아진 것입니다.
만 90세가 되었는데 내가 잘못했나, 올해 들어 만 90세라고, 살다 보니 90세라는 나이를 살아가게 되었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는데 그걸 기념해주지 못하다니 그것도 찜찜합니다. 이러다가 언젠가 우리가 영영 만나지 못하는 날이 오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것이 분명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IT TOOK ME 90 YEARS TO LOOK THIS GOOD!"
새로 쓰고 온 저 모자의 글을 보고 내가 그 모자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얼른 벗어서 내게 건네주며 미국 어느 대학 부총장인 딸이 모자가게에 주문해서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나는 90년이 걸려서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멋지게 보이려고 90년을 보냈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요. "흥, 90년이 지나니까 꼴좋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저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는 것도 그리 쉽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IT TOOK ME 90 YEARS TO LOOK THIS GOOD"은 좋은 축하입니다.
누가 뭐라든 그가 스스로 멋진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멋있는 노인으로 좀 더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이 그에게 주는 내 선물입니다.
15만 원짜리 샴페인을 한 잔 마시며 얘기하면 더 좋겠지만 우리 둘 중 누가 돈을 내든 그건 나에겐 사치니까, 내겐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내게도 어쩌다가 15만 원짜리 샴페인이나 와인이 생기기도 했지만 나는 매번 그 귀한 술은 남에게 주었으니까, 나는 겨우 그 정도의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맛좋은 와인이나 샴페인보다 훨씬 소중한 내 친구에게 이렇게 내 마음의 선물을 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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