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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로버트 풀검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by 답설재 2023. 11. 6.

로버트 풀검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IT WAS ON FIRE WHEN I LAY DOWN ON IT

박종서 옮김, 김영사 1990

 

 

 

 

 

 

1989년에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를 읽은 나는 이듬해 6월 이 책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 나오자마자 구입했지만 앞부분을 조금 읽고는 33년째 잊고 있었는데 최근 이 책 두 권이 나란히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다시 읽기 시작했고, 이렇게 재미있는 걸 덮어두었다니 싶어서 버렸던 물건을 되찾아온 느낌이었다.

 

 

상자 안에 보관된 기념품 가운데 조그만 종이 주머니가 하나 있다. 도시락 주머니만 한 것이다. 주머니의 윗부분은 테이프, 철침, 클립 등으로 봉해져 있지만, 옆구리가 너덜너덜 찢어져 있어서 안에 든 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특별한 도시락 주머니를 나는 어림잡아 14년 동안이나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다. 하지만 이 주머니는 알고 보면 내 딸 몰리의 것이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고 나서부터, 몰리는 자기와 자기 오빠들, 그리고 내가 가져갈 도시락 싸는 일에 열성껏 참여했다. 각각의 도시락 주머니에는 샌드위치, 사과, 우유 살 돈, 그리고 때로는 어떤 말을 적은 쪽지나 별식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집에서 나오려는데, 몰리는 두 개의 주머니를 내게 주었다. 하나는 날마다 받던 도시락 주머니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테이프와 철침, 클립으로 봉해진 그 주머니였다.

(......)

점심때, 나는 서둘러 도시락을 먹으면서, 몰리가 준 또 하나의 주머니를 찢어 열고 흔들어서 안에 든 것들을 쏟았다. 머리 리본 두 개, 밤톨만 한 돌멩이 세 개, 플라스틱 공룡 한 개, 몽당연필 한 개, 조그만 조가비 한 개, 동물 모양의 크래커 두 개, 대리석 조각 한 개, 쓰던 립스틱 한 개, 조그만 인형 한 개, 초콜릿 과자 두 개, 그리고 1 센터짜리 동전 열세 개가 나왔다.

 

─ 「딸이 내게 가르쳐 준 사랑」중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제부터는 독후감에 책 본문을 많이 옮겨 쓰는 걸 자제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한 군데만 더 옮기기로 했다.

 

 

뇌 연구 분야에서 지난 25년 동안에 나온 가장 새겨 둘 만한 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머리의 겉모양이 서로 다른 것처럼, 머릿속에 든 것도 서로 다르다."

주위를 둘러보라. 사람의 머리가 보여 주는 무한한 다양성이 보일 것이다. 살갗, 머리털, 나이, 인종에 따른 특징, 크기, 색깔, 모양이 저마다 서로 다르다. 그런데 머릿속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 것, 배우는 방식,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 기억하고 있는 것, 일을 처리하는 방법 등이 저마다 서로 다른 것이다. 더욱이 바깥 세계는 머릿속으로부터 투사되는 인식의 결과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는 사실이 기적이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똑같은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우리는 기껏해야 엉성한 합의에 근거해서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지식은 하루하루의 생활에서 나와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참을성 있게 대하도록 한다. 나는

"당신은 왜 내가 보는 방식으로 보지 않소?" 하고 탓하기보다는,

"당신은 그런 식으로 봅니까? 그거 참 놀랍군요!" 하고 말하고 싶다.

미주리 어딘가에 있는 실험실의 병 속에 있다는 아인슈타인의 뇌가 생각난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뭐 좀 다른 데가 있나 알아보기 위해 그 뇌를 꺼내서 조사했다고 한다(별다른 점은 없었다. 그가 신비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뇌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썼기 때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 과학 연구소에 있을 때, 어떤 손님이 실험실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이 위대한 과학자는 씽긋 웃으면서 만년필을 들어 올려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와!)

 

「인간 두뇌의 신비」중에서 마지막 부분.

 

 

이렇게 옮겨 썼으니 됐다, 이젠 읽기나 하자 싶었는데 옮겨 쓰고 싶은 부분은 자꾸 나왔다. 할 수 없이 로버트 풀검, 이 사람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풀검의 계명'이나 옮겨 써 두기로 했다.

 

나 풀검은 그 둘의 중간쯤의 자리에 서서 '풀검의 권고'를 제시한다. 이것은 하느님이나 머피가 건드리지 않은 항목들이다. 이것은 십계명처럼 으스스하지도 않고, 머피의 끝없는 넋두리처럼 절망적인 것도 아니다. 내 권고는 아홉 항으로 되어 있다. 열 번째 항목은 아직 생각 중이다. 하기야 열한 번째 항목도 생각 중이기는 마찬가지지만.

 

1. 아이가 레모네이드를 팔거든 꼭 살 것.

2. 투표할 기회가 있으면 꼭 투표를 할 것.

3. 스물다섯 번째 열리는 고등학교 반창회에 꼭 참석할 것.

4. 돈보다는 시간을 택할 것.

5. 언제나 경치가 좋은 길을 택할 것.

6. 거지에게는 무엇이든 줄 것.

7. 거리의 악사들을 보게 되면 돈을 줄 것.

8. 늘 어떤 사람의 애인이 될 것.

9. 마을에 곡마단이 들어오면 꼭 구경을 갈 것.

 

─ 「풀검의 계명」중에서.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

이 책의 원제는 "IT WAS ON FIRE WHEN I LAY DOWN ON IT(깨어보니 침대에 불이 붙어 있었다)"였지만 39편 글 중에는 실제로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라는 글도 있다.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1989)고 했으면 그만이어야 하지 단 한 해만(1990)에 '유치원에서 배우지 못한 것들'이라니... 젠장...

그렇게(좀 괘씸하게) 생각하며 이 책을 읽지 않고 던져둔 것이었는데 이번에 그걸 확인해 보니까 사실은 유치원에서 배운,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아서 갖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어쨌든 이래저래 다행한 일이다.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이라니...

사람이나 책이나 그 수명은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