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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문성란(산문) 「어느 무명 시인에게 배운 것」

by 답설재 2023. 10. 31.

시처럼 읽혔다.

잔잔하게 흐르는 물 같은데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의도하지 않았을 듯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떠난 이가 있고 보낸 이가 있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영영 떠난 이도 보낸 이와 지켜본 이들도 다 행복한 사람들이었다(부러웠다).

지켜본 이 중에는 이 글을 쓴 시인이 있다(늦었겠지, 시인이 아니어도 시인처럼 살아보려고는 할 수 있는 것이었는데......).

 

 

어느 무명 시인에게 배운 것 / 문성란

 

 

스를 기다리면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래된 습관이다.

끌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이 보일 때도 있고, 구름송이를 띄운 하늘이 보일 때도 있고, 더러는 울음을 머금은 것처럼 어둡게 내려앉을 하늘일 때도 있으나 오늘은 빈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시린 하늘이다. 가지에 꽃눈을 움켜쥐고 있는 나무가 보인다. 나는 나무에 달린 꽃망울을 보거나 겨울을 통과해 봄이 가까워진 지점을 지나노라면 어떤 목소리를 듣는다. 먼 이별 앞에서 나직이 읊는 시편 같은 작별 인사.

해 전의 일이다. 지병으로 오래 고생하시던 시숙님이 곧 떠날 채비를 하신다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니 시숙님은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가녀린 들숨날숨만 반복하셨다. 잠시 후 직장에서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조카를 끝으로 가족과 친지들이 다 모인 것을 확인한 나의 손윗동서는 침착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

 

   보이소, 듣고 계시지예

   오늘은 삼월 초이틀 지금은 오후 2시 34분입니더

   하늘이 흐린 걸 보니 비가 오려나 봐요

   비가 다녀가면 당신이 좋아하는 목련이 피겠네예

   보이소, 잠깐 눈 좀 떠 보이소

   여기 누구누구 왔는지 보이소

   당신 아들 아무개와 며늘아기 여깃심더

   큰딸, 작은딸, 막내딸 그리고 동생 아무개와 아무개, 당신이 보고 싶어 하던 사람들 여기 왔어예.

 

냇동생인 나의 남편과 제수되는 내 이름까지 다 호명하고 나서도 작별 인사는 조금 더 이어졌다. 그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으나 마지막 인사는 또렷이 생각난다.

 

   보이소,

   그동안 고생 많았심니더

   이제 여기 일은 다 내려놓고 훨훨 가볍게 가이소.

   먼저 가서 내를 기다려주이소

   내 곧 뒤따라 가꼬마

   그동안 고마웠어요.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구도 울지 않았고 무거운 침묵조차도 내려앉지 않았다. 시를 외는 듯 노래를 부르는 듯 구성진 가락으로 이어지는 작별 인사를 모두 귀 기울여 들었다. 사람의 신체기능 중 맨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게 청각이라니 어쩌면 서로 평소에 입 밖으로 쉬이 꺼내놓고 나누지도 못했을 그 말,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아내의 절절한 고백이 전해진 것인지 누워계신 시숙님의 지그시 감은 눈가에서 맑은 눈물 한줄기가 흐르다 머리카락 사이로 숨는 것이 보였다. 무언의 대답이 아니었을까. 동서의 작별 인사가 끝난 후 시숙님은 돌아올 수 없는 먼길을 떠나셨다. 평온한 모습으로.

리는 한 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도 있고, 무언가를 남기는 인연도 있고, 생을 관통하는 중요한 만남도 있다. 그때 내가 들었던 그 구슬프면서도 구성진 가락은 그 어떤 노래보다 절절했고, 내가 아는 어떤 시구보다 아름다웠다.

생에서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 내놓는 작별 인사는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적인 시였다. 감정을 절제하고 한 구절 한 구절 속마음을 건네는 그 사랑의 인사는 마음결을 닦아주는 보드란 손수건이었고, 따뜻한 감사였고 아름다운 시였기에 나는 지금도 그날 나의 손윗동서가 무명의 시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미래동시모임 동인지 《나 나왔다》(지도 박두순, 회장 김순영)에는 아홉 명이 동시 네 편, 산문 한 편씩을 보여주었다.

'일상 엿보기'로 실린 산문은 다음과 같았다.

 

서금복 「열두 띠 이야기하다가」

조영수 「선물

김순영 「12살 목도리

문성란 「어느 무명 시인에게 배운 것

박순영 「작은 여행의 맛

조은희 「산책로에서 만난 자연의 몸짓들

정나래 「가슴 뛰게 하는 일

류병숙 「꽃가위

전지영 「노랑 생활

 

다 詩 같아서 천천히 읽어야지 했는데, (이런!) 생각뿐이었고 시와 산문들을 하룻저녁에 다 읽고 말았네!

 

이 동인지는 또 언제 나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