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by 답설재 2023. 10. 20.

레이 브래드버리 《화씨 451》

박상준 옮김, 황금가지 2009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정보만 중요하게 취급되는 축약의 세상, 벽면 TV가 즉각적·말초적 결론을 내려주는 세상, 빠른 속도의 문화에 중독된 사람들이 쾌락만을 추구하는 세상(가까운 미래)...

독서는 비판적인 생각을 갖게 하므로 책을 소지하는 행위는 불법이다.

가이 몬태그는 그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불태우는 직업을 가진 방화수(fireman)다.

자신이 하는 일에 전혀 의문을 가지지 않았던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생동감 넘치는 호기심을 가진 옆집 소녀 클라리세 매클린을 만나게 되면서("아저씬 행복하세요?") 자신의 삶이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 소녀 클라리세가 실종되면서 자신의 깨달음에 따른 생각을 실행하게 된다.

파버 교수의 격려를 받게 된 그는 소방서장 비티와 동료들을 불태우고 도주하여 학자, 교수, 목사 등 '책사람들(book people)'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핵 재앙이 일어나 도시가 파괴되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게 되지만 그들의 기억을 통해서 문명이 재건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비티 소장이 몬태그와 그의 부인 밀드레드에게 설명하는 장면.

 

"상상을 해 봐. 자네가 영사기를 돌린다고 생각해 보게. 19세기 사람이 말과 개와 짐마차를 끌고 느릿느릿 꾸물거리던 광경을. 그다음 20세기엔 화면이 좀 더 빨라지지. 책들이 점점 얇아지기 시작했지. 요약, 압축, 다이제스트판, 타블로이드판, 그리고 내용들도 죄다 말장난 비슷하게 가볍고 손쉬운 것들로 변해 갔지."

"가볍고 손쉽게."

밀드레드가 끄덕거렸다.

"고전들이 15분짜리 라디오 단막극으로 마구 압축되어 각색되고 다시 2분짜리 짤막한 소개 말로, 결국에는 열 내지 열두 줄 정도로 말라비틀어져 백과사전 한 귀퉁이로 쫓겨났지. 물론 내가 좀 과장하긴 했지만, 백과사전은 원래 그렇게 보라고 만든 거 아닌가. 아무튼 예를 들면 『햄릿』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차츰 줄어들었네. 부인도 아마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겁니다. 나중에는 '햄릿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해 드립니다.' 해서 보면 기껏해야 한 페이지 정도 설명해 놓은 게 다가 되었지. 그러면서 광고엔 이렇게 나오고. 이제 당신은 모든 고전들을 완전히 통달할 수 있습니다. 읽으십시오!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 되십시오. 알겠나? (...)"

 

이런 설명도 보인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집단의식을 고양시키는, 함께 즐길 수 있는 것들이지. 그런 생각은 못 해 봤겠지, 자네? 조직하고 조직하고 또 조직하는 걸세. 집단 운동, 집단의식. 책에는 좀 더 많은 만화를, 좀 더 많은 그림을 집어넣고, 머리로 가는 지식은 가면 갈수록 적어지는 거야. 점점 더 단순하고 말초적이 되어 가는 거지. 고속도로는 온통 어디로들 몰려다니는 사람들로 꽉꽉 메워졌네. 여기로, 저기로, 결국은 도착하는 곳도 없지. 가솔린 방랑자라고나 할까.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모텔로 변하고, 주민들은 마치 파도처럼 왔다가 밀려가는 방랑자들로 끊임없이 뒤바뀌지."

 

몬태그는 파버 교수에게 텔레비전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제 얘기를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혼자 떠들어 대는 벽을 보고는 얘기를 나눌 수가 없어요. 내 아내와도 얘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아내는 하루 종일 벽면 텔레비전만 상대합니다. 내가 해야만 될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누구든 필요합니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찬찬히 들어 보면 내 얘기가 중요하다는 걸 알 텐데, 심각한 내용인데 말입니다. (...)"

 

문득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텔레비전 속 인물들을 떠올린다. 나는 날마다 그들(우리 사회의 일류들)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들은 나를 전혀 모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