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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by 답설재 2023. 10. 15.

   위수정(단편소설) 「없음으로」

『현대문학』 2023년 10월호

 

 

 

 

 

 

위수정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프로필을 보면 '1977년 부산 출생, 동국대 국문과 졸업, 2017년 『동아일보』 등단, 소설집 『은의 세계』, 〈김유정작가상〉 수상'으로 되어 있다.

이 단편 말고 전에도 이 작가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순식간에 읽었다. 다 그럴 것 같은 장면들로 이어진다.

평론가들은 평론을 하고 나는 이 소설을 다 옮겨 쓸 수는 없어서 두 군데를 옮겨놓기로 했다. 이 부분을 보면 언제라도 생각날 것 같았다.

화자 세진이는, 애인을 죽여서 뒷마당에 묻은 살인자 세준과 쌍둥이로 태어난 누나다.

 

 

누군가 담벼락에 빨간 래커로 낙서를 해놓았다. 사형하라! 나는 급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문을 잠갔다. 전화기를 들고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또 R에게 연락했다. R은 두서없는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잠시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방문을 잠근 채 휴대폰만 바라보았다. R에게서는 한참 연락이 없었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두려움에 손이 덜덜 떨렸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었다. 아주 세게 깨물었다. R에게 전화가 온 것은 정확히 43분이 지난 후였다. 청소 전문가를 불러 지워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집에 잠깐만 와 주면 안 돼? R은 아무 대답이 없다가 조용히 말했다. 청소 업체에 예약해줄게.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다음 날 청소 전문 업체가 와서 낙서를 지웠지만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낙서가 담벼락을 덮었다. 누군가 음식물 쓰레기를 집 안으로 던졌다. 한밤중에 유리창이 박살 나고 돌멩이가 날아들었을 때, 나는 떨면서 112에 도움을 요청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집에 온 경찰은 CCTV를 확인해 보겠다고 했지만 연락이 없었다. 장을 보기 위해 대문을 나서면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를 비난하는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

어머니는 다시 걸레를 들고 이미 먼지 하나 없는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뭔가 있을 거야. 내가 모르는 뭔가가. 그리고 여기는 우리 집이고 아직 안 팔렸으니까. 싸게 내놨는데.

이 집은 안 팔려요.

그럼 계속 그냥 사는 거지.

그러세요, 그러면.

세진아,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등을 돌린 채였다. 왜요

내 잘못이지?

아니에요. 아닌 것 같아요.

우리는 같이 살았잖아. 나는 엄마고, 그러면.

나 좀 봐요. 우리 꼴을 보라고요.

내가 예전에 너희를 쫓아낸 적이 있지. 말 안 듣는다고. 그때 엄청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리고 걔가 보던 책을 찢어버린 적도 있어. 기억나니?

엄마,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세준이한테는 그런 게 상처로 남은 게 아닐까.

상처?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정말 웃기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웃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구원이라도 바라는 듯한 표정으로. 간절한 표정으로. 비참한 표정으로. 엄마, 걔는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어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걔는 그런 사람이, 아니, 사람도 아닌 뭔가가 돼버린 거예요. 이미 그렇게 돼버렸어요. 언제 그렇게 됐는지는, 아마 자기도 모를걸요?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내가 인터넷을 찾아봤어. 사람들이 그러는데, 우리도 똑같다더라. 애미 애비가.

이 집에서 나가야 해요.

내가 그걸 낳았다니, 내가 몰랐다니.

그러고도 우리는 그 집에서 한 달을 더 살았다. 나는 엉망이 된 잔디를 손수 깎았다. 집을 예전으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일에 집중하면 생각이 멈출 때가 있었고 숨이 쉬어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또다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깜빡. 그러다, 아침이 되면 갓 지은 밥 냄새가 나를 깨웠다. 나는 김이 나는 하얀 쌀밥과 금방 끓인 계란국과 갈치구이를 앞에 두고 생각했다. 이것은 벌이구나. 나는 벌을 받고 있구나.

 

 

위수정의 문장은 꾸밈이 없다. 스토리를 갖고 한 마디 한 마디 나아간다. 어떻게 해서 꾸밈이 없을까. 어떻게 해서 한달음에 읽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