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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by 답설재 2023. 9. 9.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2

 

 

 

 

 

 

환상적, 초현실적인 세상을 그린 단편소설집이다.

그런 세상을 사실처럼 그려놓아서 읽는 동안 그 세상에 빠져들게 했다. 출처를 밝히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등장시키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끌어들이니까 이야기 내용이 마치 역사적인 일들처럼 인식되었다.

인상 깊고 재미있다.

 

「죽지 않는 사람」「죽은 사람」「신학자들」「전사(戰士)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 등 17편 중 「독일 레퀴엠」「신의 글」 두 편을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것은 무작위로 선정된 (무작위처럼 보이는) 열네 개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다. 내가 그 글을 큰 소리로 말하기만 해도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 말만 하면, 나는 이 석조 감방을 없애버릴 수 있고, 환한 낮이 나의 밤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으며, 젊어질 수도 있고, 죽지 않는 존재가 될 수도 있으며, 호랑이가 알바라도를 죽여 버리게 할 수도 있고, 성스러운 칼을 스페인 사람들의 가슴에 찌를 수도 있으며, 피라미드를 다시 세울 수도 있고, 제국을 다시 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흔 개의 음절과 열네 개의 단어, 그리고 나 치나칸은 한때 목테수마(Moctezuma 혹은 Montezuma : 1466?~1520, 1502년부터 1520년까지 아즈텍 왕국을 통치한 황제)가 통치했던 땅들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결코 그런 단어를 말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치나칸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호랑이들의 몸에 적혀 있는 미스터리는 나와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우주를 언뜻 보았던 사람, 우주의 불타는 설계도를 보았던 사람은 한 사람과 그의 하찮은 행운이나 불행 따위를 생각할 수 없다. 비록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일지라도 말이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이제 그는 그 누구도 아닌데, 왜 또 다른 사람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왜 또 다른 사람의 국가에 관심을 보이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 문구를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래서 어둠 속에 누워 세월이 나를 잊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 중 한 명인 페드로 데 알바라도가 불살라 버린 카올롬 피라미드의 마술사 치나칸의 이야기를 쓴「신의 글」 후반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