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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by 답설재 2023. 8. 23.

 

 

 

송섬(단편소설) 「남들이 못 보는 것」

《현대문학》 2023년 8월호

 

 

 

유령을 볼 수 있다. 유령들은 대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이번 여자 유령은 어디든 따라다니며 그만 죽어버리라고,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다고 부추긴다. 집에선 두들겨 맞고 알바나 하고 그러지 말고 아예 죽어버리면 더 좋다고 이문동 126-39번지 자신이 살던 방 그곳에 가서 죽으면 된다고 비번까지 알려준다.

A여고 3학년이고 공부할 시간도 없지만 학교 수업만은 열심히 들어서 간호대에 가기로 했고 그만한 성적은 나오고 있다. 집안 사정은 좋지 않다. 어머니는 야간작업도 마다하지 않는데 알콜 중독 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타령이고 걸리면 꼬투리를 잡아서 매타작이다.

 

마침내 그 방을 찾아간다.

 

 

유령이 살던 원룸은 그의 말대로 비어 있었다. 비밀번호도 알려준 대로였다. 창문을 막았던 테이프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고, 바닥에는 까만 자국이 나 있었다. 집 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리자 유령은 왠지 불안한 투로 물었다.

「너 정말 죽으려고?」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방 선반을 뒤졌다. 그가 쓰던 물건들은 아직 처분하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곰돌이 푸가 그려진 다이소 접시의 양은 냄비, 컵 몇 개와 수저 두 벌, 굿인지 뭔지를 한 다음 치운다고 했다.

「그래. 넌 정말로 죽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네 엄마조차 네 편이 아니던데. 얘, 거기 아무것도 없어. 번개탄은 내가 다 썼거든. 죽으려면 차라리......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

유령이 내 앞을 막아섰다.

"비켜."

나는 힘없이 말했다.

「죽지 마, 응? 내가 자꾸 이랬다저랬다 해서 미안한데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 어디 갈 곳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냥 외롭게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 엄마는 나 죽은 다음 바로 절에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래도 성불할 수 있는 건 아니더라. 그러니까 죽지 마.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나는 유령의 말을 무시하고 찬장을 뒤졌다. 촌스러운 꽃무늬 유리컵 두 개를 찾아내 번개탄 자국 앞에 앉았다. 유령은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며 횡설수설하는 중이었다.

나는 소주 뚜껑을 열어 유리컵 두 잔에 가득 채웠다. 한 잔은 유령 앞에 놔 주고 한 잔은 내가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단숨에 들이켰다. 처음 마셔보는 소주의 맛은 이상하게 달고, 아리고, 끈적했다. 유령은 소주를 마시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계속 보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아, 나는 조용히 웅얼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유령의 온기 없는 손이 내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는 듯했다.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나니 현관 앞이 분주했다. 사람 몇 명이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현관을 나섰다. ●

 

 

송섬(1995년생. 2022년 '박지리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장편소설『골목의 조』이란 작가가 쓴 단편소설 마지막 부분을 옮겨썼다.

가뜩이나 아리송했을 문장을 번역해서 읽는다는 것이 정말로 고역인 번역본을 읽다가 이런 작품을 읽으면 마음까지 편안해진다. 이렇게 좋은데 왜 어떤 작가는 철학책 같은 소설을 쓰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