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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학교교육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우리 형제님들, 자매님들?"

by 답설재 2023. 7. 24.

 

 

 

교육 현장의 갈등이 극에 달한 것 아닌가 싶고 이대로 갈 수 있겠나 싶고 이런 교육방법 말고는 없나 의구심을 갖게 된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어느 젊은 정치가는 교사와 학부모 간의 개인적인 소통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수도 있을까, 어처구니가 없다.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다.

 

알랭 드 보통이 색다르고 요란한 교육방법을 제안한 걸 봤다.

이걸 적용해 보자는 얘기는 아니다.

 

 

테네시 주 녹스빌의 뉴 비전 침례교회의 무대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주장 앞에서는 거의 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 중 누구도 감옥에 있지 않습니다."

("아멘, 옳습니다, 아멘, 목사님" 하고 회중이 말한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형제님들, 자매님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마음속의 감옥에도 있지 않아야 합니다."

("아멘, 목사님.")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우리 형제님들, 그리고 자매님들?"

("아멘, 아멘, 아멘!")

 

인문학 분야의 전형적인 강의에 비추어볼 때 이보다 더 대조적인 것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이보다 더 불필요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학계의 거드름 피우는 태도는 과연 어떤 목적에 도움을 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약 100명의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합창단이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소리 높여 찬양할 경우, 몽테뉴의 에세이에 담긴 의미의 범위는 훨씬 더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부름과 응답 형식의 리드미컬한 가사로 이루어지기만 했더라도, 루소의 철학적 진리는 우리의 의식 속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인문학 강사를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순절 교파 설교자에게 보내 훈련을 시키지 않는 한, 세속 교육은 결코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그런 다음에야 소심한 우리의 교육자들은 자신의 금기 의식에서 벗어나 시인 키츠(1795-1821)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1723-1790)를 강연하는 도중에도, 예의범절에 관한 허위의식에 얽매이는 일이 없이, 혼수상태에 빠진 청중을 향해서 이렇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묻겠습니다.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오직 그런 뒤에야 눈물범벅이 된 학생들은 기꺼이 무릎을 꿇고,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들 중의 일부의 영(靈)이 자신들 속에 들어와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럴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세속 교육은 결코 그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데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모르겠다.

나는 우선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우리 형제님들, 그리고 자매님들?"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묻겠습니다. 제 말뜻 아시겠습니까?"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어느 곳에서는 더할 수 없는 진정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도 그게 다른 곳에서도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고 마침내 개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어려움을 극복해나가야 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