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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한여진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by 답설재 2023. 4. 9.

느닷없이 나타나는 밤에 대해서

 

 

한여진

 

 

이른 아침 그는 시장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가 내다 팔기 위해 장롱에서 꺼내온 놋그릇이 그의 오랜 집이었다

그는 커다란 이빨을 쓰다듬으며 택시를 탔다

 

도깨비세요?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도깨비 손님은.

요새는 통 나올 일이 없어서요.

하긴 그래요. 밖은 좋지 않은 것들투성이죠

 

택시는 한낮의 도로를 천천히 달렸다 택시 기사는 신중한 동작으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오래된 팝송을 틀었다 그러고는 예전에 만난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손이 기막히게 빠른 야바위꾼이었는데

세 개의 엎어진 컵을 이리저리

눈 깜짝할 새 없이 옮기다 보면

꼭 하나의 컵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고

그럴 땐 손가락을 들어 그 어떤 것을 가리켜도

컵이 열리는 순간 번쩍하고 깊은 밤이 찾아와서

사람들은 기절하듯 잠에 들고 각자 보고 싶은 것들을 꿈꾸고

그러다 정신 차려보면 그는 홀연히 사라진 뒤였죠

물론 주머니에 있는 것들을 다 털린 채였어요

 

택시는 남산터널을 달리고 있었다

옅게 퍼져 있는 자몽색 불빛으로 터널 안은 가득했고

라디오에서는 피아노와 트럼펫 선율이 낮고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터널을 빠져나오자 순간 번쩍하며 칠흑 같은 밤이 펼쳐져 있었다

옛 생각에 잠겨 있던 택시 기사가 놀라 사방을 돌아보았지만

그건 믿을 수 없이 까만 밤이었고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깊고 검은 밤이었는데

손등으로 두 뺨을 쓸어보자 축축해서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았을 땐 아무도 없었고

택시는 계속해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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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진  2019년 《문학동네》 등단.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할 땐 막걸리 때문에, 그 막걸리로 밤을 새울 것 같은 동료들 때문에 걸핏하면 밤중에 귀가했는데 자전거를 끌고 비틀거리면 멀리서 도깨비불이 어서 오라고 보였다 사라졌다 했다.

아, 그리운 도깨비...

그땐 도깨비들도 많았는데...

온갖 도깨비가 다 있었는데...

 

어느 시인이 이 블로그 보고 소개해준 "도깨비 도감" 살 때 "요괴도감"도 샀었는데 이후로는 그런 도감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런 도감들은 기초(基礎)만 보여준다.진짜 도깨비는 응용 편에 나오고 그건 내가 알아서 생각하고 봐야 한다.

하기야 드라마 "도깨비"도 그럴듯하긴 하다. 할일도 없는 신세이긴 하지만 요즘 TV는 볼 게 없다면서 세 번이나 봤네.

 

지난 1월 《현대문학》에서 이 시를 봤다.

시인이 아는 택시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