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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장정일 「저수지」

by 답설재 2023. 4. 25.

 

 

저수지

 

 

장정일

 

 

마을 앞 손바닥만 한 못에서 개헤엄을 치던 여름방학 때의 어느 날, 동네 형들과 이웃 마을 저수지로 원정을 갔다. 형들이 긴 나뭇가지로 길 옆에 난 수풀을 휙휙 치면, 조무래기들도 따라서 작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저수지로 가는 길가에 드문드문 가지밭이 있었다. 형들은 햇빛에 익어 뜨끈뜨끈해진 가지를 베어 물었다. 형들이 "맛있다"고 우물거리면 조무래기들도 "맛있다"고 조잘거렸다. 형들이 "아, 맛없어" 하며 등 너머로 반쯤 베어 문 가지를 내어 던지면, 조무래기들도 입에 든 가지를 퉤퉤 소리 내어 내뱉었다. "아, 맛없어" 우리 입술은 가지 물이 들어 모두 자주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장성처럼 우뚝한 짙푸른 둔덕이 나타났다. 형들이 인디언 같은 소리를 내며 앞장서 뛰자, 조무래기들도 "호이, 호이" 소리치며 따라 뛰었다. 가파른 제방에 올라서니, 학교 운동장보다 몇 배 큰 저수지가 땡땡하게 배가 부푼 채 누워 있었다. 그리고 둔덕 아래서는 들리지 않던 이웃 마을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와 물장구 소리가 돌연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하늘 높이 옷을 벗어 던진 형들은 물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었고, 조무래기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이 마을에 사는 4학년 1반 계집애를 봤다. 2주 만에 만난 그 애는 아프리카 토인처럼 새카맸고, 수영복 대신 입고 있는 면 팬티는 노랗게 민물이 들어 있었다. 우리는 마치 조퇴를 하고 먼 나라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 같았다. 그 애는 나를 보더니 물속으로 뛰어들어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게 온몸을 감추었고, 나도 그 애를 뒤따라 형들과 조무래기들이 물싸움을 하고 있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물가에서 물장구를 치던 형들이 말했다. "자, 건너자!" 그러자 모두들 저수지를 건너기 시작했다. 여름방학은 저수지보다 더 서늘했다. 나는 외톨이가 될세라 동네 형과 조무래기들이 내놓은 둥그런 물무늬를 따라 헤엄을 쳤다. 저수지 한복판에 이르자 사위가 조용해지고, 누가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수온이 내려갔다. 가지 먹은 신물이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꾹 눌러 삼켰다. 그러면 물귀신이 좋아서 모여들 거야. 저수지에는 해마다 소년이 빠져 죽는다. 경박한 라디오 아나운서들은 "수영 미숙으로 인한 익사"라고 떠들어 댄다. 하지만 수영 미숙으로 죽는 소년은 어디에도 없다. 나는 슬며시 몸을 뒤집어 봤다. 그것은 한 번도 배워 보지 않은 동작이었다. 하늘에는 먼저 배영을 배운 구름 한 점이 둥둥 떠 있었다. 뒤늦게 저수지 건너편에 이르자 먼저 도착한 형들과 조무래기들이 물가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도착했다는 듯이 나도 슬며시 잡담 속에 끼었다. 그러자 모두 나를 힐끗 보더니, 이렇게 합창을 했다. "자, 건너자!" 일순, 여름방학의 온도가 조금 더 내려갔다. 소년은 옷을 벗어 놓은 맞은편 물가를 보면서, 어서 방학이 끝나기를 헤아렸다. 팔다리가 가늘고 새까만 그 애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다면...... 그 애와 입맞춤을 하는 상상을 하며, 소년은 알 수 없는 요기를 내뿜는 저수지에 몸을 내던졌다. 깊고 서늘한 물속에서 보이지 않는 머리카락이 소년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그 여름들이 떠오른다.

시인에게는 이것 말고 뭘 더 요청하고 기대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