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2018(1987)
2019년 12월 26일 성탄절 이튿날 동네 서점에서 이 시집을 샀다.
1987년 3월 30일, 시인이 스물다섯 살 때 초판을 냈으니까 나는 33년 만에 마침내 이 시집을 산 것이다.
나는 시, 소설, 희곡, 수필처럼 버젓한 이름을 가진 글이 아닌 잡문이나 쓰며 지냈지만 33년 만에,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날 단 한 권이라도 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내게는 중차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식 키친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싱크대를 달고 가스렌지 설치하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부엌까지 끌어온 수도꼭지 삑삑 틀어 과일 씻어놓고
가스렌지 탁탁 켜 계란 구으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밥상에 실어 안방까지 나를 일 없이
소시지, 버터를 냉장고에서 꺼내 척척 식탁 위에 차리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토스터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누르니 빵이 뻥뻥 튀어 오르네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칙칙 끓는 포트물로 커피 만들어 마시고
드르륵 믹서 돌려 토마토주스 만드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간편한 식사가 끝나면,
남편은 포크, 나이프, 접시 등을 싱크대 앞에서 찹찹 씻고
아내는 그 옆에서 콧노래 부르며 그것들을 닦아 찬장에 챙긴다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간단한 설거지가 끝나면,
남편은 아내의 입술을 마요네즈가 묻어 있는 후식으로 얻고 나서 출근을 하고
아내는 말끔히 닦여진 식탁 위에 《굿 하우스 키핑》*을 펼친다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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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ood House Keeping, 주부들을 위한 미국의 여성잡지.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으며 대체로 가슴이 아팠다. 그런 시들이었다. 마지막 두 번째에 실려 있는 이 시를 읽고 나는 처음으로 픽 웃음을 터뜨렸다.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그렇게 바꾸자 변화가 일어났다는 의미라기보다 '그렇게 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 같아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반복하는 것 같아서 더 우습거나 재미있었다. 그 변화를 바라보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져서 (이렇게 말하면 실례가 되겠지만) 무슨 '웃찾사' 한 토막을 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정말 우습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좀 재미있어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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