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학년 때였던가 6학년 때였던가, 모처럼 12색인 크레파스를 앞에 놓고 황홀했었다.
'이런 색도 있단 말이지?'
온갖 색깔을 거쳐 무채색마저 흰색, 회색, 검은색 세 가지를 다 갖추어 이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바다를 그리면서 한 가지 색으로 칠하게 되므로 다른 책은 쓰지 않아서 좋았고 더구나 하늘도 파란색이어서 더 좋았다.
괜히 다른 색을 써야 한다면 그게 무슨 꼴인가 싶었다.
그렇지만 그 파란색이 한꺼번에 너무 많이 닳아서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다음에는 초록과 검정 두 가지 색만 쓰면 되는 수박을 그렸고
그다음엔 노랑과 빨강 두 가지 색만 써서 태양을 그렸다.
크레파스가 퍽 퍽 닳은 걸 보면 색칠이 희미하긴 하지만 잘 닳지 않는 크레용이 더 실용적이긴 하다고 생각했다.
저렇게 화려한 존재의 색연필이 있다는 건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다.
나는 저걸 구경하는 순간 저 엄청난 색의 세계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저 수많은 색깔에 나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에게도 없는 돈을 한 뭉치씩 줄 수는 없지만, 저 색연필로써 나의 모든 것을 주게 되면 상대방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그렇지만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저 색연필을 어떻게 남에게 선물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그만 단 한 사람에게도 선물하지 못하고 말았다.
아, 실없는 나의 세상......
사실은 나는 저렇게 찬란한 색연필은 도저히 쓸 수가 없는 사람이다.
저 물건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저 색연필을 남에게 선물한다는 건 생각만 해두었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이었다.
나는 결국 그렇게 된 것이다.
저 화려한 세상을 내가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다시 태어나면 저 색연필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렇지만 색연필 때문에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아, 나는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