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TV가 27%밖에 안 되는 거예요

by 답설재 2021. 2. 26.

아직 공식 발표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KBS 같은 경우 2019년 적자가 1,300억 원에 가까울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 국민 1,000명에게 저녁 7시면 어떤 매체를 보는지 설문조사를 했더니 56.7퍼센트가 유튜브를 본다고 대답했어요. 지상파가 18퍼센트, 그다음으로 케이블이 9퍼센트가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TV가 27퍼센트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것도 TV 본다는 분들은 대부분 50대 이상이었고요.

 

 

《코로나 사피엔스》(인플루엔셜 2020)라는 책에서 최재붕 교수(성균관대학교 서비스융합디자인학과)가 한 말입니다.

 

"TV가 27퍼센트? 야호! 신난다!"

그럴 사람이 있을까요?

"신난다고? 무슨 신?" 그러겠지요? "그렇지? TV 앞은 노인네 차지지" 그럴 사람은 있겠지만...

 

나는 신이 났습니다.

드러내 놓고 좋아하면 방송사에 찍힐까 봐 좀 그렇지만(난 뭐 연예인도 아니어서 찍힐 일도 없고 찍혀도 그만이지만) '바보상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모른 척하더니 그 봐! 잘~ 됐다! 꼴좋~다!' 싶었습니다.

이어서 어떤 양상이 전개될지 잘은 모르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도 있을 것 같아서 심지어 좀 벅차기까지 했습니다.

 

TV에 소개되는 집들을 보면 웬만한 집들은 널찍널찍해서 이쪽 방에서 TV를 켜놓고 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저쪽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내가 사는 이 아파트는 스무 평 남짓이어서 우리는 잔기침만 해도 서로 다 듣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일어난 사람이 아침부터 켜놓은 TV에서 뉴스를 전하는 기자들의 웅변(!)이 아직 누워 있는 쪽(당연히 나)의 머리와 가슴을 파고듭니다.

아나운서들은 나직나직한 경향인데 기자들은 웬만하면 신이 난 듯, 큰일 났다는 듯 고함을 질러 스무 평 남짓을 흔들어댑니다.

 

오죽하면 인터넷과 전화, TV를 연결하는 시스템을 재계약하면서 회사 여직원이 TV 두 대를 연결하면 더 저렴하다고 했을 때 "나는 TV를 혐오하는데요!" 했겠습니까? 전화 통화로 살아가는 그 여성은 수많은 사례를 경험했겠지만 "TV를 혐오한다!"라는 말은 처음 들었을 수도 있겠지요? 당황했는지 어안이 벙벙했는지 말을 잇지 못했는데 내가 다시 TV는 한 대로 충분하다고 해서 그 상황은 곧 정리되었지만 그녀는 나중에 옆자리의 직원에게 "참 희한한 고객도 있다"고 했을 것 같았습니다.

 

TV를 켜지 않고 지내거나 아예 들여놓지 말지 그랬느냐고 하겠습니까?

늘그막에 단둘이 살면서 그걸 '투표'로 정해서 '실시'합니까? 민주적으로? 사람은 그렇게 사는 것입니까?

남의 일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무슨 정치하듯 얘기합니까?

 

그렇다면 TV에 신경을 쓰지 말고 초연하게 지내도록 하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당연하죠.

 

더는 매일 밤 〈뉴스아워〉를 시청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정치나 지구온난화에 관련된 논쟁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초연이다. 나는 중동 문제, 지구온난화, 증대하는 불평등에 여전히 관심이 깊지만, 이런 것은 이제 내 몫이 아니다. 이런 것은 미래에 속한 일이다.

 

올리버 색스의 글을 보는 순간에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말이 그렇지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스무 평 남짓에서 어떻게.

도인(道人)도 아닌데 웅웅거리고 악악거리는 소리를 외면할 방법이 있겠습니까?

나는 어제도 오늘도 장시간 TV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프로그램 중에는 더러 마음에 드는 것이 없지는 않아서 그럴 때는 위안을 느끼기도 하고 훨씬 더 자주 짜증스러워하며 살아갑니다.

 

 

 

프로그램 중에서 더러 마음에 들었던 것의 사례

 

 

그래서 그렇게 짜증스러워서 TV 시청률이 겨우 27%라는 글을 보고 신이 낫지요.

'내 생전에 TV가 이렇게 작살나는 꼴을 보다니...'

그렇게 생각한 건데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걸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

*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나의 생애My Own Life〉, (《고맙습니다Gratitude》김명남 옮김, 알마 2016, 28쪽).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이 폭발했다"  (0) 2021.03.05
바다에서의 죽음  (0) 2021.02.28
나는 왜 아플까?  (0) 2021.02.21
저승 가는 길에 듣는 알람  (0) 2021.02.16
코로나 시대 철학자들은 언제 입을 열까?  (0) 2021.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