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비전 갖기, 갖게 하기

by 답설재 2020. 7. 21.

2020.7.10.

 

 

    1

 

  어느 기자가 잘 아는 노숙자를 만나 숙소에 들어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회유하는 장면입니다. 노숙자는 음악을 하다가 정신병에 걸렸습니다(스티브 로페즈 『솔로이스트』랜덤하우스 2009, 98).

 

  "매일매일 짐을 꾸렸다가 풀지 않아도 되니까 연습할 시간이 더 많아지잖아요."

  그에게는 준비된 답이 있었다. 항상 그랬다.

  "있다고 인정하기는 정말 싫지만 내 비전은 모차르트가 해낸 일을 하고 죽는 거예요. 내 비전은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머나먼 장래의 일을 걱정하지 않는 거죠. 그냥 무사히 거리를 건너고 그걸로 감사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람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지내면 나머지 문제는 음악이 다 해결해줄 거예요."

  신문학을 전공하고, 수천 개의 칼럼을 쓰고, 세상 물정에도 꽤 밝은 나였지만 이 대답에는 뭐라고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이렇게 한 마디씩 할 때마다 지적인 도전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내는 순전히 자신의 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내게는 그에 대한 답이 없었다. 나다니엘에게는 허망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선 일리가 있는 철학적 견해가 있었고, 이런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해야 할 질문들을 그가 미리 알아내어 날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비전(vision)이라는 건 가령 직위가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적은 사람에게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하는 것이 그리 적절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또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2

 

  비전, 여러 번 사용한 경험까지 있는 단어지만 비전이 '희망' '포부' '진로' '전망' 등의 단어들과 어떻게 다른지, 우리말로는 어떻게 번역되는지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서 사전을 보았더니 '내다보이는 미래의 상황'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내다보이는 미래의 상황? 이거야 원....... 점점....... 참고어는 전망(展望), 유의어는 미래상(未來像)인데 그것으로도 '아직'이고 "이 책은 정치, 경제, 과학, 문화 분야에 걸쳐 21세기에 대한 비전이 폭넓게 제시되어 있다" "이 사건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 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번 재능 나눔은 유원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업을 위한 전공 관련 고민과 진로 상담, 인생의 비전 등을 주제로 진행됐다" 등의 예문을 보니까 좀 구체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 한 사회의 비전이 있을 수 있고 한 회사, 한 가정, 한 개인에게도 있을 수 있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은, 아니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고귀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성향, 적성, 능력, 소질, 환경 등의 조건에 맞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한계가 뻔한데도 '나는 멋진 국회의원이 되겠다!'는 비전을 정해 놓았다고 해서 그 꿈이 이루어질 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나의 경우를 생각하면 그것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나는 나의 이 인생을 곧 마쳐야 할 이 시기에 이르러도 그것을 설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등산이라면 언제까지 어느 길로 어디까지 올라갈지 정하지 못한 것이고, 항해라면 어느 쪽으로 어디를 가는 것인지 정하지 못한 것이니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문(家門)이 이미 어린 시절부터 비전을 설정하기에 유리하다면 행복한 일입니다. 자신이 비전을 정하는 데 도움을 주는 스승을 만날 수 있으면 그것도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일찍부터 책을 읽어서 비전을 정할 수 있다면 그것도 멋진 경우가 될 것입니다.

 

 

    4

 

  내가 교육자라면, 나는 나에게 맡겨진 교육자로서의 삶을 다 살고 난 다음, 그러니까 퇴임을 한 뒤에 비로소 읽고 깨달은 책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이미 소용도 없을 때에야  평소에 읽었어야 할 책들을 비로소 읽은 것이었습니다.

  교육자가 되기 전에 읽을 수 없었다면, 교육자가 된 다음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혹은 교육에 관한 일을 하면서라도 읽을 수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현직에 있을 때는 책을 읽을 겨를이 없었습니다. 특히 교사 시절에는, 대부분 그랬지만, 하루에 겨우 10분, 15분의 시간을 마련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심지어 교사시절 초기에는 높은 분들이 읽으라는 책을 정해주었고, 심지어 어떤 교장은 장학사가 나오기 전에 개인별로 몇 권씩의 책을 배당해주고 붉은색 혹은 푸른색 펜으로 여기저기 밑줄을 많이 그어 두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책마다 읽은 사람 명단을 붙여 놓기도 했는데, 나는 아직 읽지도 않은 책에 내 도장을 찍으며 교장 선생님께 매우 송구스러워서 만날 때마다 고개도 들지 못했습니다.

 

 

    5

 

  아직까지 비전을 설정하지 못한 나는 슬픈 마음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내 비전은 모차르트가 해낸 일을 하고 죽는 거예요. 내 비전은 하느님과 가까이 지내면서 머나먼 장래의 일을 걱정하지 않는 거죠. 그냥 무사히 거리를 건너고 그걸로 감사하고 그런 식으로 살아가죠.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람들을 예의 바르게 대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지내면 나머지 문제는 음악이 다 해결해줄 거예요."

 

  노숙자면 어떻습니까? 나도 이런 비전을 갖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요.

  비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의 이 후회로써 비전을 갖게 해주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건 가능하겠지요? 그것도 불가능합니까?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쯤에서 그만 입추(立秋)?  (0) 2020.08.05
등산 혹은 산책, 삶의 지혜  (0) 2020.07.26
나의 노후·사후  (0) 2020.07.11
알 수 없는 분노  (0) 2020.07.04
아름답고 신비로운 여행  (0) 2020.07.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