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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이쯤에서 그만 입추(立秋)?

by 답설재 2020. 8. 5.

 

 

S그룹 사보에서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방법-다산 정약용의〈소서팔사(消暑八事)〉'를 읽었다.

 

1. 송단호시(松壇弧矢)·소나무 언덕에서 활쏘기

2. 괴음추천(槐陰鞦遷)·느티나무에서 그네 타기

3. 허각투호(虛閣投壺)·빈 집에서 투호 놀이

4. 청점혁기(淸簟奕棋)·돗자리에서 바둑 두기

5. 서지상하(西池賞荷)·서쪽 연못의 연꽃 구경

6. 동림청선(東林聽蟬)·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

7. 우일사운(雨日射韻)·비 오는 날 시 짓기

8. 월야탁족(月夜濯足)·달밤에 발 담그기

 

이 형편에서 내가 적용해 볼 만한 걸 찾다가 올여름의 성격을 생각했다. 기상청은 더위가 길고 극심할 것으로 예고했다. 그 예고를 두어 차례 들었고 그때마다 열대야가 한 달 이상 지속된 재작년 여름을 떠올리며 두려워했다.

 

코로나 19로 인한 괴로움에 무더위가 겹치면 어떻게 하나. 무심코 한 말이겠지만 무슨 말 끝에 "걸리면 죽는다!"고 한 어느 친구의 말은 지병까지 있는 내겐 걸핏하면 생각나는 경고가 되었고,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하게 해석되면서 여름용 '비말 차단용 마스크'가 나왔거나 말거나 4중으로 된 KF 94 마스크를 고수하고 있어 여기에 무더위가 극심하면 어떻게 사나 싶었다.

 

이래저래 모든 게 얼떨떨한 2020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미래학자들이 구구 각색으로 예고해온 그 미래 중 한 가지인가 싶기도 했다.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한 아파트에 살며 인사도 나누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아무래도 나이가 더 많은 내가 미안함을 느끼며 지냈다. 반면 비록 별 내용도 없는 인사말이라도 나누는 아이들이나 몇몇 젊은이들이 있어서 위안을 느끼기도 했는데 이젠 완전 '거꾸로'가 되었다. 모두들 누가 가까이 다가올까 봐 경계하게 되었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내가 돌변해서 와락 덮칠지도 모른다는 양 이쪽으로 들어온 아이를 사정없이 끌어당겨 벽 쪽으로 몰아세우는 젊은 엄마만 해도 그렇다. 2020년, 이제 이 아파트 사람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이웃이 아니라 서로의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최대한 경계해야 하는 무서운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니, 아이들 교과서의 그 덕목들은 이제 어떻게 가르치게 되는지, 교사가 아닌데도 암담한 느낌이다. "거리는 멀어도 마음은 가깝게!" 겨우 그 구호가 이제는 추억이 된 지난해까지의 그 행복했던 일상의 실낱같은 흔적이 되고 있다.

 

설상가상 일주일째 장마가 이어지고 있다. 비는 연일 억수로 쏟아져서 사상자가 엄청나고 마을이 물에 완전히 잠기고 댐마다 수문을 열었는데 다음 주까지도 내내 비가 쏟아진다는 예보가 나오고 있다. 이건 또 어떻게 하지?

 

다행인 것은 그럭저럭 가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구 마음대로였는지, 그렇게 불편한 일상 속으로도 봄이 오고 이어서 여름이 오고 하더니 내일모레가 입추다! 입추... 입추가 지나거나 말거나 여름이 한없이 계속되고 무더위나 장마가 오래 이어진 적이 있었나? 그렇지 않다면 "유례없는 더위" 따위는 물 건너갔고, 이 판에 장마에 대한 기상청 예보도 빗나간 것이기를 기대해 보고 싶다. 기상청 전문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 그들의 예보가 빗나간 사례는 심심찮게 있었다. 이번 한 번을 보탠다고 해서 신뢰에 금이 가서 큰 일 날 것도 없을 것이다.

 

섭섭하기도 하다. 가을이라니! 올해는 속아도 이만저만 속은 것 같질 않다. 가을도 오면 곧 간다. 가을이 길게 이어지는 걸 본 기억도 내겐 없다. 나도 교과서대로 우리나라는 사철이 뚜렷하다는 걸 설명할 수 있다. 3, 4, 5월은 봄, 6, 7, 8월은 여름, 9, 10, 11월은 가을, 12, 1, 2월은 겨울이라는 걸 날씨나 생활모습의 변화를 들어 구분해 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름·겨울이 아주 길게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 아주 잠깐 봄, 가을이 슬쩍 끼어들게 된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걸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래저래 2020년은 억울한 한 해가 되고 말 것 같다. 이 세월을 누가 조정하고 있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이 한 해는 공제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연히 주장하고 싶다. 그게 안 되겠다면 차선책의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손해배상! "그럼 이건 되겠지요?" 하고 내미는 양보 불가능한 내 카드는 손해배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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