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에서 방세 내고 밥 사먹고 마을 노인들 환갑 칠순 팔순 구순 잔치에 축의금 내고 초상 때 부조금 내고 경로잔치 때 떡값 보내고 나면 남는 것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돈을 받지 않고도 연명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노인들만 남은 산골은 초저녁부터 캄캄했고 개구리들이 울어댔다. 개구리울음은 여백을 허용하지 않았고, 시간과 공간을 긁어댔다. 새벽에는 개구리울음이 그친 자리에서 별들이 와글거렸다. 나는 때때로 노량진 집현전 원룸의 어둠을 가르던 지하철 전조등 불빛과 거리에서 짐승처럼 울어대던 버스의 에어브레이크 소리를 생각했다. 섹스가 끝나면 영자는 (…)
2018년 여름, 어느 월간지에서 김훈의 단편소설 〈영자〉를 읽다가 이 대목을 필사해 두었는데 가능하다면 내 초등 동기 H에게 보여주었으면 싶어서였다.

H는 상도동에서 오랫동안 정육점을 운영했는데 대형마트가 늘어나면서 차츰 찾는 사람이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파리만 날리게 되었고, 바로 그때 아들이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일대 경사(一大慶事)를 맞이했다
공교롭게 아들의 공무원시험 결과 발표에 이어 우리 동기회 모임이 있었고, 그날 나는 좀 일찍 나가게 되어 그가 우리 동기들이 빨리 좀 모이기를 조바심을 내며 기다리는 모습을 자초지종 다 지켜보았고('이 사람이 오늘 왜 이러지?') 드디어 모두들 좌정했을 때 하필이면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외치듯 한 말을, 나는 그야말로 정면으로 듣게 되었던 것이다.
"나도 이제 살게 됐네!"
누가 들으면 아들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한 줄 알았을 만했다(사실은 그것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하도 커서 충분히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몇몇은 어안이 벙벙한 채 축하한다고 일단 성급한 격려사를 했지만, 두엇은 대체 뭐냐고 물었는데 그는 자신도 얼른 밝히고 싶은 차라는 듯 다시 외쳤다.
"내 자식도 이제 공무원이야!"
그러면서 이번에 9급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고 덧붙였다. H는 이번에도 나를 보고 외쳤는데 사실은 시종일관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나만 공무원이었다. 사실은 돈 많이 번다고 만나기만 하면 자랑질하는 녀석, 사장인 녀석도 있지만 시시한 학교라도 대학 나온 사람은 나밖에 없기도 했다.
그 시간에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1. 지난번에 내가 이 사람들을 광화문 사무실 근처 식당으로 초청해서 러시아산 대게를 맛보게 한 일이 있지. 그때 좋은 술이라고 좀 과음하는 것 같더라니... 부러웠구나. 이 사람아! 그 대게, 내 가족은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네.
2. 자네 아들, 앞으로 좀 괴롭겠네. 공무원이 봉급만 받아 떵떵거리고 잘 살면 그건 이상야릇한 가짜 공무원이야.
자세히 얘기해서 뭘 하겠나.
H는 이미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근무하게 된 곳으로 아들 따라 이사를 갔다가 실망해서 도로 이사 나오더니 아랫녘 어디로 농사를 지으러 내려간다고 한 뒤로는 전화도 잘 받지 않았었고 그다음엔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안타까웠다.
쩔쩔매는 아들을 보고 실망했을까? 공무원이 뭐 그러냐고 생각했을까? 내 생각도 좀 했을까? 다 같은 공무원인데 답설재는 어떻게 좋은 술에 대게도 먹을 수 있을까 의아해했을까?
나는 온갖 생각을 다해 보았다.
그 H에게 김훈의 소설 저 대문을 보여주고, 다른 얘기도 전해주고 싶었었다.
한 공무원이 있었다고, 공무원 봉급 받아서 부모 걱정해야 했고, 일찍 세상 떠난 부모 있어 새 부모도 모셔야 했고, 하나같이 졸졸 따라다니는 일곱 명 형제자매 다 커서 직장 다니고 결혼할 때까지 어떻게든 돌보아야 했고, 그러면서 몇 명 제 자식도 낳아 허덕였는데, 그 동생들은 다 잘 살게 되더니 부모형제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들 했고, 삼십 년 사십 년 오십 년 제사 지내다 돌아보니까 제사상 앞에서 절하는 사람은 자신 뿐이었다고, 마침 그 동생들 중 한 명이 공무원 자식을 두었는데 봉급 받아 오는 걸 보고는 '어떻게 살았지?' 깜짝 놀랐더라고, 그 공무원이라고 사람이 아니었을까? 속으로는 많이 섭섭해했다고, 그러다가 이제 돈 쓸 일 별로 없게 되자 공교롭게도 정년이 되고 퇴임하게 되면서 옷도 버리고 책도 버리고 아예 마음까지 비워버린 지금은 돈 없어도 괜찮다고, 참 홀가분해서 지금 당장 이승을 떠나도 전혀 괜찮겠다 한다고...
그 얘기도 전해주고 싶었는데, H가 가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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