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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고요, 오리무중(五里霧中)

by 답설재 2025. 12. 20.

 

 

 

 

붉고 거대한 태양이 에스테렐 산 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라스의 분지로부터 오렌지꽃 향기가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 왔다. 날씨가 아주 따뜻했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장편소설 『향수』의 한 문장이다. 이렇게 이어진다.

 

 

이러한 긴장감이 시끄러운 외침, 혼란, 광폭함, 혹은 그 밖의 어떤 군중 시위로 폭발되지 않고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요한 정적 속에 말굽 소리와 마차 바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죄수 장 밥티스트 그르노이가 처형장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교수형으로 그 죗값을 치를 흉악범 그르누이를 태운 마차가 입장하는 순간이라는 걸 생각하면 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있는데도 저렇게 조용했다는 것이 전혀 불쾌하진 않다.

 

 

그날은 기이하리만치 평소와 똑같았다. 흰 구름 사이로 태양이 평화롭게 흘러가고, 새들은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나무들은 잔잔한 바람에 맞추어 춤추듯 흔들렸다.

 

 

이 문장은 이스마엘 베아의 실화소설 『집으로 가는 길』에 나온다. 이렇게 이어진다.

 

 

'이건 말도 안 돼.'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반군이 가까이 있다는 낌새는 전혀 없었는데.'

 

 

전쟁이 터진 것이다. 그동안 읽었던 소설에서 전쟁 전야는 흔히 이런 식이었던 것 같아서 저 고요는 전혀 좋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경각심이고 뭐고 큰일을 예고하는 고요라면 차라리 시끌벅적한 세상이 더 좋다. 좀 살아보니까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