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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김기택 「벽 3」

by 답설재 2024. 3. 13.

1989년 봄,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은 오전 내내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내 생애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담임하고 있었고 그해 겨울 서울로 직장을 옮겨 교육행정기관에서 근무하게 되지만 그 봄에는 아직 그걸 모르고 있었다.

 

교회 사찰집사님 아들과 그 교회 목사님 아들이 함께 우리 반이 되었다.

목사님 아들은 수더분하고 정직하고 의젓하고 영리해서 저절로 사랑스러웠고, 집사님 아들은 기가 죽을까 봐 스킨십도 자주 하고 이름도 자주 불러주고 했더니 누가 보거나 말거나 걸핏하면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앉았다. 그렇지만 자주 풀이 죽고 말이 없어서 그럴 때마다 까닭을 물으면 엄마 아빠가 밤새 싸워서 아침도 못 먹고 왔다고 했다.

어느 날, 또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고함을 질러버렸다. "네 엄마 아빠 당장 학교로 오라고 해!"

 

아이들이 돌아간 교실에서 다 잊고 머리를 식히려고 운동장을 내다보며 쉬고 있는데

어?!!!

사찰집사님 부부가 고개를 숙이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어오고 있었다.

어쩌지?

진짜 오네!

이걸 어쩌지? 어떻게 수습하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으니 일단 그냥 나가보는 거다, 마음을 다잡고 그들을 맞아들여 거기 그 자리에 앉으라고, 집사님 아들 책상 걸상을 가리키며 거기 나란히 앉으라고 했다. 그렇게 하고는 냅다 고함을 질러버렸다.

"아니, 어쩌자고 허구한 날 싸움질인가요? 애 보는 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싸워도 그렇지! 아침부터 애 밥을 굶기는 데가 어디 있어요! 입이 있으면 말 좀 해보세요! 예?"

"......"

"애가 두 사람 보고 뭘 배우겠어요? 장차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나요? 허구한 날 부부싸움이나 하는 남자가 되면 좋을까요? 아니, 대답 좀 하라니까요! 왜 두 사람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렇게 앉아만 있나요!"

"......"

사실은 내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으니 대답을 하고 싶어도 겨를이 없었을 것이었다.

"잘했나요! 잘 못했나요!"

"잘못했습니다."

한 명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른 한 명도 똑같은 소리를 냈다.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또 싸울 건가요?"

"싸우지 않겠습니다."

"믿어도 좋을까요?"

"예."

"더 크게 분명하게 대답하세요!"

"예!" "예!"

 

몇 마디 더 했을 것이다.

아마 그때쯤은 나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이웃반 선생님이 물었다. "누구에게 그렇게 고함을 지르셨어요?" "몰라도 돼요.^^ 쑥스러워요.")

 

나는 집사님 부부에게 우리 반 아이들이 싸움을 했을 때 부탁하던 그대로 주문했다.

"두 분이 손잡고 돌아가세요. 교문을 나서서도 그 손 놓지 마세요. 알았어요?"

"예." "예."

 

 

 

 

 

 

 

벽 3

 

 

김기택

 

 

죽을래?와 죽여봐가 또 벽에서 나온다. 자정이 지난 시간. 벽에는 거의 죽었다가 살아나는 소리가 있고 질식되어 나올 엄두를 못 내다 간신히 새어 나오는 아이 울음소리가 있다. 벽 속에서 옆집이 다시 깨어난다. 벽은 주먹과 입이 달린 소리가 된다.

 

소리는 거칠게 날뛰고 무섭게 부딪치고 깨지지만 벽으로 안전하게 보호되어 있다. 당장 무너지거나 죽어나갈 것 같은 일들도 벽에서는 곧 고요해지고 지루해진다. 벽 속은 우글우글하고 울퉁불퉁하고 꿈틀꿈틀해도 벽지는 반들반들하고 은은하고 산뜻하며 가족사진은 단란하다. 윽박질과 악다구니, 비명과 울음은 시멘트와 함께 반죽이 된 채 굳어져 말하는 벽, 울부짖는 벽, 진저리 치는 벽이 되어 있다. 질량이 없는 것들은 벽에 스며들 뿐 다음 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콘크리트가 가족과 일상사를 단단하게 싸 발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바깥으로 새어 나갈 우려가 없다. 벽 속에서 악쓰는 소리는 늘 평평하고 반듯하고, 울부짖음은 늘 제자리에 서서 튼튼하기만 하며, 비명은 사각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이와 경계와 틈을 향해 벽들이 모여든다. 가르고 막고 가두며 뻗어나가다가 벽에 부딪치면 벽을 타넘고 벽 위에 줄 맞추며 쌓인다. 단단하게 콘크리트 된 괴성과 욕지거리와 숨 막힘이 고층으로 올라간다. 들판을 덮고 강을 건너고 산기슭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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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태아의 잠』『바늘구멍 속의 폭풍』『사무원』『소』『껌』『갈라진다 갈라진다』 등. <김수영 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수상.

 

 

 

시인이 소개한 벽 속 사람들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수치스럽다.

별 수 없는 게 수치스럽다.

 

오랜만에,『현대문학』 2016년 1월호에 실렸던 시를 읽고 내 얘기를 하는 건 직접적으로 수치스럽고 해서 옛일을 떠올려봤다. 집사님 부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내가 잠시 사랑한 그 아이, 집사님 부부의 그 아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아무도 내게 묻지 않기를... 그럼 겨우 추스르는 가슴이 영영 무너지니까 부디 없었던 일처럼 지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