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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진달래

by 답설재 2020. 3. 31.

 

 

 

 

        1

 

산길에서 진달래를 만나는 이 나날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처음엔 '또 진달래가 피네' 했습니다.

오늘은 또 생각했습니다.

'다 피고 나면 어떻게 하나?'

'봄이 다 가면 그때는 그럼 어떻게 하나?'

 

 

    2

 

195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아득한 그 어디쯤에서 진달래 꽃잎을 따먹고 있으면

입술이 새빨간 사람에게 잡아먹힌다고 했습니다.

내 빨간 간을 내가 보는 데서 꺼내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건 정말 무서운 일이지만,

입술 붉은 그 사람은 분명 병자(病者)이니까 성치는 않을 그 몸으로 주춤주춤 다가오면,

미끈거릴 고무신을 얼른 벗어 들고 뛰어 달아나면 그만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달래 꽃잎 좀 따먹지 않고는 힘이 너무 들었는데,

그렇지만 입술이 퍼렇도록 그걸 따먹어도 배는 점점 더 고팠습니다.

 

태어나 보니까 일본말이 너무 많이 섞인 세상이었는데 그건 나의 잘못은 아니었습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쟁까지 일어났고 나는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몰랐습니다.

온갖 일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각자 알아서 그렇게 헐떡이며 왔는데 이제는

천지에 '코로나'라는 게 퍼지고 있습니다.

 

 

    3

 

이번엔 정말로 내 힘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른 것들도 그랬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정말이지 내 힘으로 통제할 길이 없는 그저 막막한 것이어서

그 흔하던 마스크조차 선택적으로는 구입할 수 없어서

생각만 해도 숨이 턱 턱 막힙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정신이 들기도 전에 이 일들이 생각나고

힘겹게 하루의 낮을 보내면 어김없이 저녁이 됩니다.

그 저녁에도 온통 그 생각이고

잠이라도 제대로 자자 싶어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리에 눕지만

자다가 깨면 또 생각이 납니다.

 

 

    4

 

나는 웬만큼 살았으니까 죽어도 서러워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런데도 나는 서럽습니다.

이 상황을 이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나의 일을 내 힘만으로는 전혀 통제할 수가 없어서 막막하고 서럽습니다.

죽음이야 어차피 내 힘으로 통제되지 못할 것인데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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