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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아멜리 노통브《적의 화장법》

by 답설재 2020. 2. 29.

아멜리 노통브 《적의 화장법》

성귀수 옮김, 문학세계사 2005

 

 

 

 

 

 

 

1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어 책을 읽고 있는 제롬 앙귀스트에게 텍스토르 텍셀이라는 사람이 다가와 20년 전에 자신이 앙귀스트의 아내를 강간했고, 10년 전에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고백합니다.

 

그리고는 제발 벌을 받게 해달라고, 죽여달라고 간청하지만 앙귀스트는 그 고백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당신 정말이지 비겁한 작자로군! 결국엔 나를 죽이지 않으려고 내가 살인자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려는 수작이야."(109)

 

 

2

 

결국 사내는 자신이 바로 제롬 앙귀스트 당신 자신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자네야. 자네 자신은 모르지만 그런 자네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네의 어느 부분이 바로 나이지. 자네가 억지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자네의 한 부분이 바로 나일세."(123)

 

앙귀스트는 무슨 증거를 대서라도 텍스토르 텍셀의 그 증언을 부정하려고 합니다.

 

"난 내 아내를 강간하지 않았소!"

"그건 사실이네. 다만 20년 전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무척이나 강간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 밤에는 그걸 꿈으로 꿀 정도로 말이야.(…) (125)

 

 

3

 

마침내 제롬 앙귀스트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지금 나는 하이드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킬 박사쯤 되겠구만."

"너무 부풀리진 말게나. 자네가 지킬 박사보다 훨씬 떨어지는 친구인만큼, 자네 안에 도사리고 있는 괴물도 저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하이드 씨보단 한참 보잘것없는 건달이니까. 자넨 결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위대한 학자가 아니야. 그저 숱하게 널려 있는 속 좁은 비즈니스맨에 불과해. 그나마 내세울 점이 하나 있다면, 희생자가 자네 아내라는 점뿐이지. 지난 10년간의 그 홀아비 생활이야말로 자네의 유일한 덕목이었다고나 할까."(129)

 

텍스토르 텍셀은 제롬 앙귀스트의 내부의 적(敵)입니다. 그 적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디오니소스적, 비도덕적인 요소입니다.(165)

 

 

4

 

소설은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르 텍셀 간의 대화(결국, 제롬 앙귀스트의 독백)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설명은 첫머리와 끝부분에 있고, 중간에는 대여섯 군데에 딱 한 문장씩 들어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 부분(제롬 앙귀스트의 자살)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1999년 3월 24일,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의 이륙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광경을 목도했다. 이륙 시간이 특별한 설명도 없이 세 번씩이나 거듭 연기되자, 승객 중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로비의 한쪽 구석으로 각 수 차례에 걸쳐 무작정 벽에다 머리통을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는 어딘지 예사롭지 않은 난폭성을 보이며 잔뜩 흥분해 있었는지라, 감히 누구도 개입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죽음이 닥칠 때까지 계속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을 그 자살행위를 목격한 증인들은 자세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벽에다가 머리를 처박을 때마다 그 남자는 똑같은 고함소리로 자신의 동작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외치던 소리는 이런 것이었다.

"자유! 자유! 자유!"(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