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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달빛 아래 눕기

by 답설재 2019. 5. 19.






                                                                                                                   2019.4.27.




달빛 아래 눕기






    *


  괜히 잠이 깨어 잠시 일어나 앉았습니다.


  첫새벽이어서 다시 누우려고 뒤돌아보다가 그 자리에 달빛이 들어와 있는 걸 보았습니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올려다봤더니 우기(雨氣)가 차 있어 선연하진 않은 대신 평소에 비해 부드러운 모습이었습니다.

  달빛이 나를 찾아와 '잠시 일어나 보라'고 깨운 것 같았습니다.

  음력 4월 14일이었습니다.



    *


  소동파(소식)1가 황주 유배지에서 쓴 수필 「승천사의 밤놀이」(記承天寺夜遊)입니다.2


  원풍 6년 10월 12일 밤, 옷을 벗고 잠에 들려고 하는데 달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혼연히 일어나 서성거리다가 더불어 함께 달의 정취를 즐길 이가 없음을 생각하고, 드디어 승천사에 이르러 장회민張懷民을 찾았다. 회민도 역시 잠 못 이루다가 서로 더불어 뜨락을 거닐었다.

  뜰아래로는 물이 차 있는 듯 달빛이 환하게 밝았고, 물 가운데 마른풀들이 서로 얽혔는데, 보이는 것이 바로 대나무와 측백나무 그림자였다.

  어느 밤엔들 달빛이 없으랴마는, 어느 곳엔들 대나무와 측백나무가 없으랴마는, 우리 두 사람같이 한적한 이는 드물구나.



    *


  장 그르니에가 에세이 『지중해의 영감』에서 이야기한 달밤은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배웠던 노래 속의 달빛이 떠오르게 했습니다.3


  그대는 다르 자루크4의 밤들을, 달빛이 바다의 수면에 거품 같은 빛을 뿌려놓던 그 투명한 밤들을 기억하는가. 그 많은 폐허들 위에, 그 많은 추억들 위에, 그 많은 살아 있는 존재들과 그 많은 희망들 위에 시간이 멈추어 있었다. 눈 속에, 마음속에 모든 형태를 만들어내 보였던 그 풍경에서 무엇인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그 '무엇'이란? 나는 감히 거기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겠다. 그것은 그토록 많은 세기의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도 듣지 못했던 어떤 목소리일까? 내가 그 풍경 속에서나 그와 유사한 다른 몇몇 풍경들 속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란 대체 무엇일까? 장엄함일까, 태평함일까, 조화로움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쾌락의 욕구, 이 갈증은 또 무슨 까닭일까? ― 아니면 무관심일까? 하지만 떠나는 순간에 흔들어대는 손짓 같은 이 불안감은 무슨 까닭일까? 그리고 왜 이 모든 것이 나의 지극한 행복감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


  달빛이 내리고 있는 내 자리는 꽃잎 깔린 자리, 혹은 물결이 잦아든 연못 같았습니다.

  '이 자리에 누워야 한다니…….'

  아깝고 미안하였습니다.









  1. 蘇東坡(蘇軾) [본문으로]
  2. 왕수이자오 『소동파 평전』(조규백 옮김, 돌베개, 2013), 134~135. 이 책에는 원문도 함께 실려 있음. [본문으로]
  3.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김화영 옮김, 이른비 2018), 65. [본문으로]
  4. 튀니스의 메디나에 위치한 자루크 귀족 가문이 살던 대저택.(원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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