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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엄연한 '노후'

by 답설재 2018. 12. 23.

 

 

 

 

 

 

1

 

날씨가 좀 풀렸다고 말한다.

하나마나한 말이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이제 집에 들어가도 좋은 시간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안다.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굳이 그걸 얘기하지는 않는다.

하나마나일 것이다.

 

 

2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무저갱( 無底坑)*일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금방금방 까무루해진다.

그렇게 까무룩해져서 아래로, 그 아래로, 어디가 바닥인지도 모를 구렁텅이로 자꾸자꾸 내려간다.

많이 내려가면 정신을 차려봤자 다 올라오지도 못한 채 또 까무룩해진다.

 

누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자주 한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 문제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결론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얘기를 꺼내는 건 '어쩌다가'이지만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한다.

둘이 붙어 있지만 생각은 따로 하고, 그러면서 어느 쪽도 말을 꺼내진 않는다.

 

 

3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보고 지나간다.

괜찮다.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추운데 그런 곳에 앉아 쉬는지 묻지도 않는다.

 

젊었을 때에는 이렇게 늙어갈 줄 몰랐다.

아무 데나 앉아서 쉬는 늙은이들을 보면서 어렴풋이 사람은 모름지기 깔끔하게 늙어야 하고, 당연히 자신은 그렇게 늙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옷도 늙은이답지 않게 입고, 몸도 늙은이답지 않게 가꾸고, 생각도 늙은이답지 않게 하고, 말도 늙은이답지 않게 하고, 사람들도 늙은이답지 않게 만나고, 하는 일도 늙은이답지 않게 하고…… 당연히 자신은 그럴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해왔다.

자신은 나이가 들어도 늙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늙어도 누추하게 늙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늙어도 멋있는 사람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4

 

무너지기 시작하니까 걷잡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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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저갱 :  악마가 벌을 받아 한번 떨어지게 되면 영원히 나오지 못한다는  닿는 데가 없는 구렁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