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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수컷 기질 암컷 기질(데즈먼드 모리스 흉내내기)

by 답설재 2018. 10. 13.

 

 

 

1

 

저기쯤 아직 조금밖에 삭지 않은1 남녀 한 쌍이 보입니다.

 

암컷은 수컷의 팔짱을 끼었고 둘은 보조를 맞추어 걸어오고 있습니다.

암컷은 계속 뭔가를 이야기하고 수컷은 분명 가장(假裝)한 과묵으로 듣기만 합니다.

나를 보고도 비켜 걸을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고, 그 상황을 조금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2

 

그것들이 마침내 두어 걸음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컷은 줄곧 내 눈길을 살폈습니다.

내가 제 암컷을 훔쳐보지나 않는지, 제 암컷이 예쁘고 몸매도 죽여준다는 걸 확인하지나 않는지 감시하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눈길은 결코 순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란히 걷는 상황에서 그 수컷이 제 암컷의 눈길까지 살필 수는 없으므로 마주보는 내 눈길을 확인하는 것만이 가능한 방어가 될 것이었습니다.

사실은, 나는 백발이 성성하고 게다가 정수리가 뻥 뚫리도록 머리칼이 많이도 사라졌고, 얼굴 피부조차 다 삭아버린 것이 분명한데도 그 수컷은 혹 모르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3

 

그렇게, 그 수컷은 매서운 눈초리와 목에 힘이 들어간 단단한 태도와 거침없는 걸음으로, 그 암컷은 수컷의 팔짱을 낀 그대로 하던 얘기를 계속하며 나를 지나쳐 갔습니다.

나는 암컷 쪽은 살펴보지도 못했습니다.

예쁘지나 않은지, 몸매가 죽여주지나 않은지 전혀 확인하지 못한 채 지나치고 만 것입니다.

그렇게 지나치며 저 수컷은 별것도 아닌 다른 수컷을 지나친 방어 작전으로 경계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암컷도 그렇습니다.

그렇게 제 수컷에게 완전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낼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도록, 말하자면 그 상황을 나에게까지 보여줄 것은 없지 않을까 싶도록, 자신의 수컷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는 걸 과장되이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4

 

이제 저만큼 멀리 떨어진 그것들의 그 모습을 떠올려보며, 나는 이런 마주침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냈고,

그런 마주침은 상대편이 백발백중 비교적 젊은 남녀였다는 것도 생각해냈고,

그런 남녀가 따로따로, 그러니까 수컷 혼자 혹은 암컷 혼자 나와 마주칠 때는 대체로 그렇게 그런 눈빛이나 그런 태도, 그런 자세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도 생각해냈고, 말하자면 세상의 덜 삭은 암컷들이 그렇게 경계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런 경계는 수컷과 암컷이 함께 있을 때만 필요 이상으로, 혹은 과장하여 나타내는 기질이 아닌가 싶었고,

이런 느낌은, 나는 지금 한없이 삭아버렸지만 '그래도(혹은 고맙긴 하지만 뭔가 좀 억울하게도)' 외견상으로는 아직 수컷일 수 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도 했고,

 

칼 세이건에 의하면, 단세포 생물이 세포 분열 후 두 개의 독립된 세포로 되지 못하고 그대로 붙어 있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그럭저럭 약 30억 년 전이었지만, 대략 20억 년 전에는 성性이 생겼고, 성의 출현과 함께 두 개의 생물은 자신들이 가진 유전 설계도를 문단씩, 혹은 여러 쪽씩, 심지어는 몇 권씩 통째로 서로 교환할 수 있게 되었고, 오늘날 우리 인간들도 DNA 조각들을 서로 교환하는 일에 온 정성을 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는데,2 답답하기도 하지! 20억 년이나 흘렀는데도 어떻게 이 수컷 기질, 암컷 기질은 야성(野性) 거의 그대로가 아닌가 싶은 느낌을 갖게 하는가 싶었고……

 

 

5

 

그러나 잘 살펴보면 수컷들이 매번 도전적이진 않을 것입니다.

웬만하면 자신의 과격함을 과장해서 예방에 최선을 다하고 싶을 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른 수컷이 직접적으로 제 암컷을 유린하지나 않기를, 말하자면 자신이나 자신의 암컷에게 덤벼들지나 않기를 바라지만, 그러다가 그 화를 돋우면? 덤벼들면? 그야 물론 생사라도 걸고 결단을 내야 하겠지만…….

 

그럼 암컷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 피가 튀고 살이 떨어져 나갈수록 신이 날까요?

그 싸움이 마침내 세계 대전으로 번지면 더 감동적일까요?

"로미오와 줄리엣"?

"부활"?

"나비부인?"

그까짓 감동은 아무것도 아닌, 어마어마한 감격의 눈물을 흘릴 수도 있을까요?

 

글쎄요, 그 수컷의 팔에 매달려 유유히 걸어간 게 어떤 의미인지, 미묘할 뿐이었습니다.

 

 

6.

 

수컷, 암컷?

다 너스레였습니다.^^

 

나는 사실은 그 암컷들의 모습을 최소한 확인 정도는 하고 싶은 것이지만 수컷과의 눈싸움 혹은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느라고 지금까지는 암컷을 살펴보는 데 소홀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방(수컷)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런 만남을 즐거워할 것입니다.

잠깐이지만 스릴을 느끼게 되고, 잠깐이지만 이런 데즈먼드 모리스적(的) 상상이 마냥 즐겁습니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기다리면 그것들(그렇게 들어붙은 수컷과 암컷)을 만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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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괴들은 삭았다'(박상순 '요괴들의 점심식사' 중에서).
2. 칼 세이건 『코스모스』 (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2, 2009 1판29쇄, 8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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