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이야기
남 진 우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뒤안 대숲 속에 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바람 소리도 그친 깊은 밤이면 바닥에 쌓인 수북한 댓이파리를 밟으며 살그머니 다가오는 여우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곤 했다. 사각사각 여우가 달빛을 베어먹고 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처녀의 간을 베어 먹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에 잠 깨어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멀리 어둑한 대숲 속을 거니는 여우 눈빛이 손에 잡힐 듯 반짝거리곤 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대숲을 빠져나가며 피 묻은 발자국을 찍고 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실개천을 건너며 물 위에 비친 처녀의 모습을 노려보고 있다. 저것은 여우가 지나갈 때마다 지붕 위의 기와들이 곤두서는 소리, 저것은 여우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길고긴 복도의 마룻장이 삐걱이며 일제히 일어서는 소리. 깊은 밤 술렁이는 댓이파리를 물고 바람이 내 방을 휩싸고 도는 동안 살그머니 내 잠 속에 피 묻은 주둥이를 들이밀고 미소 짓는 여우를 떠올리며 나는 옆방 누이 걱정에 몸을 뒤척이곤 했다. 사각사각사각 그 옛날 내가 살던 집에 무슨 지하실이나 다락방 같은 것은 없었지만 깊은 밤마다 나는 들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을 한 거대한 장정이 내 집 어딘가에 숨어서 칼을 가는 소리를. 사각사각사각 베어 먹힌 달이 완전히 줄어들어 그믐이 된 밤 갈다 만 칼을 들고 조용히 나는 누이의 문턱을 넘어갔다. 거기 짙은 어둠 속에 여우 한 마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
남진우 1960년 전주 출생. 1981년 『동아일보』 등단.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 『죽은 자를 위한 기도』 『타오르는 책』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사랑의 어두운 저편』 등. 〈현대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수상.
『現代文學』 2017년 5월호 128~129.
우리가 함께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인간들이 하는 짓들을 보고 이런 것들 하고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마음을 돌리고 돌아와 더러 우리를 괴롭히기도 하며 지내도록 해주려면 우리가 돌아가야 하니까 이젠 다 틀린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詩 읽은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석홍이의 눈물」 (0) | 2018.08.17 |
---|---|
원옥진 「그림자 놀이」 (0) | 2018.08.14 |
박상순 「너 혼자」 (0) | 2018.07.31 |
김기택 「대머리」 (0) | 2018.06.16 |
김윤식 「소라 껍질」 (0) | 2018.06.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