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김기택
당연히 대머리 아저씨 머리에 있어야 할 대머리가
어느 날, 내 거울에 와 있는 것을 본다.
죽어도 저렇게 살지는 않겠다고 발음하는 주둥이가 달린
대머리 얼굴을 쳐다본다.
암처럼 비행기 사고처럼 당연히 남의 일이어야 할 대머리가
내 목 위에 뻔뻔하게 붙어 있는 것을 본다.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니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참 많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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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1957년 경기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신발장 거울에 비친 머리 모습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정수리 머리가 다 빠져버린 중년에는 그 벌건 부분이 내 것인데도 정작 내겐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벌겋게 된 줄은 모른 척 혹은 일쑤 잊고 지냈는데, 이후로는 앞머리가 빠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두 부분이 이어져 아예 '고속도로'가 되어버린 걸 확인한 것입니다.
대머리 하고는 상대도 하기 싫었습니다.
'대머리가 아는 것이 있어 봤자 별 수 있겠나.'
'대머리 옆에는 앉지도 말아야지.'
'대머리 주제에 잘난 척하는구나.'
…………
정말이지 내가 대머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로소 '이걸 어떻게 할 수 없나?' 싶어서 현관을 나서지 못한 채 옆머리에 붙은 머리칼로 정수리와 이마를 덮어보려고 하다가 시간만 허비했습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고 나중에 보자 싶어서 대머리인 채 길을 나서며 '우선 잘난 척하지 말자.'는 다짐을 했습니다.
'대머리가 아는 것이 있어 봤자 별 수 있겠나.'
'대머리 옆에는 앉지도 말아야지.'
'대머리 주제에 잘난 척하는구나.'
김기택 「머리카락 자화상」(에세이)*에서 이 시를 읽었습니다. '아하! 시인도 사람들처럼 대머리가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대머리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
대머리인 채로 그냥 살아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머리라서 위축될 때는 이 시를 읽으며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 『현대문학』 2018년 6월호 169~171.(『사무원』(1999)에 실린 시라고 소개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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