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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詩 읽은 이야기

노향림 「어느 거장의 죽음」

by 답설재 2018. 6. 5.

어느 거장의 죽음

 

 

 

낡은 마하 피아노가 전 재산이다

키가 유난히 작고 등이 굽은 피아니스트

그는 오래전부터 수전증을 앓고 있다.

연주 때마다 활짝 열리는 피아노 뚜껑

그 밑 낭떠러지 같은 외길이 드러나고

가는 막대 하나가 파르르 떨린다.

어디선가 가는 발목의 새들이 무더기로 날아들고

연미복 입은 그의 죽지 속에 편안히 안긴다.

새의 부리는 길고 날카롭다.

건반 위에서 무시로 떨리는 손

쾅쾅 마하 광속으로 튀는 빛으로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을 연주할 땐

어느덧 새들은 허공으로 날아가고 없다.

불빛 모두 꺼진 뒤에도 音階에 감전된

수형자처럼 그는 우두커니

한자리에 날이 새도록 앉아 있다.

 

 

―노향림(1942~ )

 

 

 

2012년 연말에 이 시를 보았습니다(조선일보 2012.12.3. '가슴으로 읽는 시).

이 시를 소개한 장석남 시인(한양대 교수)은 이렇게 썼습니다.

 

위대한 유산이란 돌을 깎아 새겨놓는 어설픈 업적이 아니다. 영원한 시간을 관통하는 인간 구원의 메시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비로소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러다가 잊고 말겠다 싶어서 옮겨 놓게 되었습니다.

거장, 거장의 죽음, 어느 거장의 죽음…….

 

 

 

2018.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