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퇴고

by 답설재 2018. 7. 18.

                                                                                                                                                                           2018.7.12.

 

 

 

블로그에 실어두면서도 그런 내용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으면 읽는 사람이 적었으면 싶은 글이 있고, 일반적으로는 읽어도 그만 읽지 않아도 그만인 글들이다.

이에 비해 '왜 이렇게도 읽지 않을까?' 싶은 글도 있다. 대체로 쓰기는 어렵고(그만큼 애를 쓴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일쑤 따분해서 읽기는 어려운 글이 그렇다.

 

오늘도 신문사에 논단 원고를 보냈다.

무더위 속에 원고를 쓰고 고치고 하면서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른다.

그렇긴 하지만 윤문은 겨우 여남은 번밖에 하지 못했다.

이런 글 중에는 아마도 마흔 번, 쉰 번은 읽으며 수정하고 또 수정한 경우도 있다.

그러면 뭘 하나, 열 번 고치면 뭘 하고 쉰 번 고치면 뭘 하나…….

 

이렇게 읽고 고치고 또 읽고 고치고 해서 마련한 글을 아무도 읽지 않으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신문에 실린 글이야 더욱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글을 이 블로그에 실어놓으면 짐작컨대 내가 가서 읽고 댓글을 써주는 블로그의 주인이 품앗이 삼아 와서 마지못해 읽고 댓글을 써주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그러자면 까칠까칠한 내용도 그렇고 짧지도 않은 글에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겠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없지도 않다. 읽는 분이 나 같은 성격이 아니어서 성의를 다해 읽고 경험을 소개하며 본문보다 더 진지한 토론을 해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

주제에 따라서는 업무나 과제 때문에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진지하게 읽고 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오늘처럼 여남은 번 읽고 수정해서 보낸 글에서 오류가 발견되지나 않을까, 정신을 차리지 못해 비문이 들어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관점을 벗어난 편견을 쓰진 않았을까, 온갖 걱정이 몰려오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책을 읽다가 '이렇게 훌륭한 글도 있구나!' 싶으면 부끄러움이 엄습하고 맥이 빠져서 글을 쓴다는 사실에 회의감을 갖게 된다.

심오하여 읽는 이가 없으면 어떠랴 싶은 글.

단 한 글자도 빼거나 더할 수 없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

논리 정연해서 읽는 순간 심장이 뛰는 글.

돌연 아득한 숲 속이나 눈 내리는 벌판으로 데리고 가는 글.

이렇게 멋모르고 살아온 것이 후회스럽고 억울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게 하는 글.

…………

 

 

사례 1. 지난번에 읽은 《스승의 옥편》에 나오는 글이다.1

 

『용제속필容齋續筆』에는 왕안석의 「사향思鄕」 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홍매洪邁가 오나라 사람의 집안에 전해오던 이 시의 초고를 보았다. 시의 제3구는 원래 "봄바람 또다시 강남 언덕에 이르니 春風又到江南岸"였다. 왕안석은 '도到' 자를 뭉개고 '과過' 자로 고쳤다. 그러자 "봄바람 또다시 강남 언덕을 지나니"가 되었다. 다시 '입入' 자로 고쳤다가, 이번엔 '만滿' 자로 고쳤다. 이렇게 십여 차례 고친 끝에야 마침내 '녹綠' 자로 결정하였다. "봄바람 또다시 강남 언덕에 푸르니 春風又綠江南岸." 이렇게 고치고 나니, 앞서의 글자들이 모두 밋밋하고 설명적인 데 반해 돌연 생동하는 화면을 이루었다. 마치 봄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강남의 언덕이 도미노가 쓰러지듯 푸른 빛깔로 물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꼭 맞는 한 단어를 찾기 위해 옛사람들은 이렇게 고심참담했다.

 

사례 2. 저 유명한 이태준의 《문장강화》에 실린 소동파의 퇴고 이야기.2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를 지었을 때 친구가 와 며칠 만에 지었느냐니까 며칠은 무슨 며칠, 지금 단번에 지었노라 하였다. 그러나 동파가 밖으로 나간 뒤에 자리 밑이 불쑥한 데를 들쳐보니 여러 날을 두고 고치고 고치고 한 초고가 한 삼태나 쌓였더란 말이 있거니와 (……)

 

사례 3. 《문장강화》의 소동파 이야기 바로 다음에는 고리키의 퇴고 이야기도 나온다.3

 

고리키도 체호프와 톨스토이에게서 무엇보다 문장이 거칠다는 비평을 받고부터는 이찌 퇴고를 심히 했던지 그의 친구가

"그렇게 자꾸 고치고 줄이다간 '어떤 사람이 났다. 사랑했다. 결혼했다. 죽었다' 네 마디밖에 안 남지 않겠나?"

했단 말도 있다.

 

 

 

....................................................

  1. 정민 《스승의 옥편》(마음산책 2007), 255.
  2. 이태준 《문장강화》 (필맥, 2010) 228.
  3. 《문장강화》229.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사랑합니다!"  (0) 2018.07.29
"꽃밭은 있습니까?"  (0) 2018.07.23
이 행복한 꽃길  (0) 2018.07.11
공부  (0) 2018.07.06
비 오는 날  (0) 2018.07.01